[역경의 열매] 박조준 <5> “영은교회서 첫 담임 목회 감격 지금도 선명”

입력 2016-11-03 20:57
쉴 틈 없이 빡빡한 일정 속에 사역을 감내했던 충신교회 전도사 시절의 필자(왼쪽 다섯 번째)와 교역자들. 충신교회 제공

쉴 사이 없는 전도사 생활은 훌륭한 목회 트레이닝 기간이었다. 평생 목회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큰 교회와 달리 작은 교회에서는 예배와 교육·지도, 교인 심방 등 교역자라면 알아야 할 모든 분야를 섭렵할 수 있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스물 일곱 살이었던 1960년 3월말, 가정을 이뤘다. 그리고 그 해 10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 안수를 받던 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어디로 부르시든지 저는 묻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믿고 가겠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지 닷새 째 되는 날 오후였다. “여기가 박 목사님 댁입니까?” 한 중년 신사가 찾아왔다. “그렇습니다만” “제가 목사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깜짝 놀랐다. ‘기도한지 닷새 만에 응답이 왔구나.’ 아내와 나는 곧장 짐을 꾸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를 데리러 오신 분과 함께 택시를 탔다. 한강 다리를 건널 때쯤 넌지시 행선지를 물어봤다. “영등포로 간다”는 답이 돌아왔다.

택시에서 내린 곳은 영등포 어느 들판에 지어진 소위 ‘무허가 주택’이었다. 집은 집인데, 도무지 집 같지 않은 집이랄까. 전기가 없어 촛불을 켜니 바람이 불어 꺼졌다. 이튿날 연탄난로를 설치하자 방 공기가 따뜻해졌다. 추운 겨울, 얼음장 같은 물을 받아 밥을 짓던 아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내는 스물 한 살 어린 나이에 대학 입학까지 포기한 채 전도사와 결혼해서 ‘사모’로 한 평생 함께 하고 있다.

주일이 되어 교회에 나가보니 예배당이 따로 없었다. 당시 서울 동신교회 이봉수 장로님이 운영하시던 동아염직 회사 식당에서 30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예배 후 성도들에게 교회 이름을 물어봤다. 그랬더니 “목사님을 모신 후에 지으려고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기도 후에 영등포 지명과 영생의 의미를 함께 담은 ‘영(永)’과 은혜의 ‘은(恩)’을 넣어 영은교회라 이름 지었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60여년의 세월이 흘러 영등포에서 큰 교회로 성장했다.

영은교회에서 경험한 첫 담임 목회는 감격스러웠다. 지금은 지역이 많이 발전해서 도시가 되었지만 그때는 서울 변두리여서 포장도로가 거의 없었다. ‘아내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고 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는 재미있었다. 헌신적인 성도들의 섬김과 사랑이 큰 힘이었다. 주일마다 새로 등록하는 성도들 가정을 심방했고, 새벽마다 교적부를 펴놓고 성도 가정 식구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기도했다. 눈만 감으면 그들의 이름과 얼굴이 떠올랐는데, 5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 분들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당시 20대 새파란 목사가 교회를 책임지다보니 장로님들의 기도 또한 특별했다. 기도하실 때마다 “젊은 종 박 목사님”이란 말이 꼭 들어가곤 했다.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젊은 종’이란 말이 왠지 모르게 지도력이 약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저런 궁리 끝에 나이가 좀 들어 보일까 해서 한복을 입은 때도 있었다. 영은 교회에서 시무한 기간은 6년. 하나님이 부어주신 축복 속에 당시 1500명의 성도들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