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안방으로 형제들을 불렀다. 그날따라 비감해 보였다. 앉은뱅이 책상 위엔 원고지가 놓여있었다. “이제 내 자서전을 쓸 거다. 너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아버지는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1975년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9호 선포와 함께 사회안전법을 발효했다. 이적죄 등 국가보안법상의 특정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을 예방한다며 필요할 경우 보안처분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남과 북을 오갔고, 남한에서 5년 간 수감생활을 했던 아버지에게 사회안전법은 공포로 다가왔던 것이다.
장례식을 치르고 유품을 정리하니 아버지가 남긴 자서전 원고는 23쪽에 멈춰있었다. 원고를 보던 중학교 3학년 딸은 언젠가 이 원고를 내가 완성하겠구나 예감했다.
김이정(56)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의 삶을 투영한 소설 ‘유령의 시간’(실천문학)으로 올해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1994년 등단해 장편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1997) ‘물 속의 사막’(2001) 등 소설 몇 권이 전부인 그가 문학상을 받기는 처음이다.
2일 서울 중구 삼청로 한 카페에서 김 작가를 만났다. “다른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해야 하는 생계형 작가다. 소설을 놓치 못하면서 내 욕심만 채우려는 것 아닌가, 회의가 많았다. 상을 받으니 계속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다.”
눈빛엔 감회가 어른거렸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2009년 초다. 글로벌금융위기 여파로 남편의 사업이 망했다. 차든, 집이든 팔수 있는 건 다 팔았다. “인생의 최대 위기였다. 아버지 얘기를 쓰려고 소설가가 됐는데, 이러다 그걸 못쓰고 끝나는 건 아닌가 두려움이 엄습했다.”
일산 자택 근처 공공 도서관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석 달 만에 초고가 완성됐다. “평생의 짐 같은 숙제였는데, 다 쓰고 나니 오히려 그 힘든 시기를 견디게 해준 구명보트였다는 걸 알았다.”
소설에서 사회주의자인 이섭은 월북했다가 현실사회주의에 실망해 다시 남으로 내려온다. 그 사이 가족은 형님의 가족과 함께 북으로 가고, 그는 남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려가는데….
심사위원들은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개인의 역사를 망가뜨리는지 를 보여주는 소설”이라며 “서둘러 달려온 한국 현대사가 흘린 남겨진 진실, 진정성을 수습하는 문학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했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노트에 사회안전법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그만큼 압박감이 컸던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간접적인 타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 소설은 1970년대가 배경인데,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그 때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거 아닌가하는 기시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실천문학이 낸 소설이 대산문학상을 받는 것도 처음이다. 실천문학은 사회참여적인 문학을 지향한다. 김 작가는 “세월호 사건 이후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 강화되고 있다”면서 “제 소설로 인해 독자들이 공동체 문제에 대해 더 고민하는 계기가 된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고 말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사진=윤성호 기자
[책과 길] 김이정 작가 “소설 배경 1970년대인데 역사 되풀이 기시감 들어”
입력 2016-11-03 17: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