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조선시대 사림의 실패, 정치적 책임을 묻다

입력 2016-11-03 17:35

“선조 즉위 전후 조정에 진출한 신진사림은 선조 8년(1575)부터 정치적으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초 사림이 처음 등장한 이래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사림 내부의 갈등 때문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동서분당’이다. 구체제 청산을 내걸고 선조 대 조정을 장악한 사림은 선배 그룹과 후배 그룹으로 분화되었다. 서인과 동인이 그것이다.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는 동서분당이 발생한 선조 8년부터 기축옥사가 일어나고 일단락 된 선조 23년까지 15년간의 당쟁 과정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조선시대 당쟁 연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선조 대를 주목한 이유는 이 시기만큼 정치에서 이상이 드높이 외쳐진 시대가 드물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매우 비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정철 국학진흥원 연구원은 “왜 도덕적, 정치적 이상에 대한 사림의 오랜 집단적 열망이 그들 중 누구도 원치 않았던 거대한 파국으로 귀결되었는지 알고 싶었다”고 저술 이유를 설명했다.

선조 5, 6년을 기점으로 구신(구체제 신하)과 신진사류의 갈등은 종식되었다. 구신을 몰아낸 신진사류는 이제야말로 개혁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조 8년 이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약한 토대 위에서 출발했던 선조는 자기 정치를 시작하면서 사림의 분열을 활용했다.

책은 이이, 유성룡, 정철, 이산해, 성혼 등 당시의 주요 정치인 200여명을 등장시켜 사림의 분열 과정을 대하 역사드라마처럼 보여준다. 동인과 서인이 각각의 인적 구성과 정치적 신념을 확립하고 갈등을 본격화한 것은 선조 11, 12년 무렵이다. 초반 주도권은 서인이 쥐는 듯 했으나 이내 동인이 득세했다. 구신들이 동인에 붙기 시작했다.

동인은 당시의 조정이 ‘외척세력 서인’ 대 ‘진정한 사림 동인’으로 대립한다고 인식했다. 자신들은 선으로, 서인은 악으로 규정했다. 이 구도에 따라 명종 말에서 선조 초에 걸친 사림의 개혁 노력은 부정되었다. 그리고 동인에 붙은 구신에게는 자동적으로 정치적 면죄부가 주어졌다.

책은 이 과정을 쫓아가면서 특히 두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다. 선조와 이이다. 사림의 리더였던 이이는 동서분당 이후에도 어느 편에 서지 않은 채 사림을 하나로 재통합하고, 그 단합된 힘으로 선조에게 개혁을 요구하고 관철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동인의 득세와 전횡을 비판했고, 서인을 소인으로 규정하는 데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무력했고 실패했다.

선조는 개혁에 뜻이 없었고 사림의 개혁 열망을 왕권 강화에 소비했다. 선조의 힘이 커질수록 조정을 주도하던 동인과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선조는 동인의 핵심이었던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기축옥사를 밀고 나가며 조정을 완전하게 장악했다. 기축옥사로 115명이 죽었고, 귀양이나 수감, 파직에 처해진 이가 100명이 넘었다.

16세기 내내 사림 다수의 희생과 인내로 열린 정치적 공간은 이렇게 선조의 독재로 귀결되고 말았다. 젊은 이상주의자들이었던 사림은 조정을 장악하고도 개혁에 실패했다. 그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물론 사림 분열이었다.

저자는 “사림의 분열은 스스로에 대한 강력한 도덕적 확신에 기인했다. 분열을 정당화하는 기제는 스스로 확신한 도덕적 정당성이었다”면서 정치에서 책임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선한 의도나 윤리가 정치를 대신할 수 없다”면서 “개인적 신념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과 사회적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은 현실에서 종종 상충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개인의 선한 신념이나 의도가 아닌 사회적 결과에 대한 책임이야말로 정치적 책임의 요체”라고 강조한다.

이 책은 순전히 선조 대 당쟁사를 다룬 것이지만, 저자의 목표는 독자들을 현대 한국 정치에 대한 성찰로 끌고 가려는 듯 하다. 왜 젊은 개혁세력은 실패하는가? 이상주의나 도덕주의는 왜 위험한가? 좋은 인격이나 진정성을 갖춘 사람이 좋은 정치를 못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6세기 사림의 실패에서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