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황모(29·여)씨는 최근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하루 11시간 강도 높은 일을 하는데도 잠자리에 누우면 통 잠이 오지 않는다. 황씨는 1일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들어가고 직장을 얻고 아등바등 돈 모으며 살았는데, 뭐 하러 그렇게 살았나 하는 회의감이 든다”며 “나라가 국민을 지켜주지 않겠느냐는 믿음이 있었는데 이젠 보호자가 사라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전남에서 농사를 짓는 유모(51)씨는 일손을 놓았다. 아내가 뉴스 그만 보고 일 좀 하라고 핀잔을 줘도 그냥 무기력한 상태다. 유씨는 “나도 주변에 용한 점쟁이 한 사람이랑 잘 엮어 군수 출마나 해볼까 싶다”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대한민국이 ‘최순실 쇼크’ ‘순실증’을 앓고 있다. ‘뭐 하러 열심히 사나’라는 말 한마디에 집단 감염됐다. 허탈감과 분노는 빠르게 번지고 있다. 정치경력도, 대단한 지식도 없는 일반인이 정부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비선실세’였다는 의혹이 점차 사실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원 최모(26·여)씨는 “일제 강점기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싶다. 나라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 속상하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정치 냉담자’였던 회사원 김모(31)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통해 최순실씨의 존재를 인정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고 했다.
여기에다 ‘최순실 일가’의 재산이 수천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박탈감과 좌절감이 더해지고 있다. 지난 31일 검찰에 소환된 최씨가 신고 있던 신발, 들고 있던 가방은 하루 종일 온라인과 SNS를 달궜다.
최씨의 딸 정유라(20)씨의 특혜 의혹도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공부의 신’으로 불리는 강성태 공신닷컴 대표는 지난 29일 인터넷 방송에서 “공부하지 말라”고 일갈했다. 강 대표는 1일 “대학생 때부터 교육봉사를 한 지 10여년이 넘었는데 그날만큼은 학생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며 “이번 사태에 어른들보다도 학생들이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경제학과에 다니는 김모(22)씨는 “열심히 공부해도 학점이 잘 안 나오는 게 다반사인데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열심히 살 이유가 하나 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사회 전체가 혹독하게 최순실 쇼크를 겪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능력주의,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가치가 송두리째 부정당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권력형 비리가 엘리트 중심이었다면 이번은 전혀 다른 모양새”라며 “사적 친분으로 국정 전반을 휘둘렀다는 점은 ‘근대화의 역행’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2002년 월드컵 이후 ‘한국사회가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대다수였는데 이번 ‘최순실 게이트’는 그 반대라는 점에서 오는 절망이 크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사태를 철저하게 수사하고, 의혹을 낱낱이 밝히지 않을 경우 더 큰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임 교수는 “근본적 해결 없이 사건이 덮어진다면 좌절과 분노가 더 심하게 내재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글=임주언 이가현 기자 eon@kmib.co.kr, 사진=김지훈 기자
[기획] 국민도 큰 상처 ‘위로’가 필요하다… 뭐 하러 열심히 사나, ‘최순실病’ 만연
입력 2016-11-02 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