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를 지나 고성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진부령이 있다. 진부령 정상(해발 520m)은 여느 고갯길과 다르다. 휴게소만 덩그러니 놓여 있지 않다. 한쪽에 군부대가 들어서 있지만 한편에는 이중섭 미술관이 들어서 있고, 미술관 앞에는 조각상도 세워져 있다. 고성군으로 내려서는 길목에는 반달곰 조각이 버티고 있다.
진부령은 대관령·한계령·미시령과 더불어 백두대간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대관령은 해발 832m로 강릉과 평창을, 군 병력을 동원해 1971년에 닦은 한계령은 해발 1004m로 인제와 양양을 잇는다. ‘동국여지승람’에 미시파령(彌時坡嶺)으로 기록된 미시령은 해발 826m로 인제 속초를 연결한다.
미시령 길은 6·25전쟁 이후 이어졌지만 인제와 고성을 잇는 진부령은 일제 강점기에 난 길이다. 당시에는 장비 탓에 굽이가 많이 생기더라도 경사를 낮출 수밖에 없었을 터. 경사가 낮은 만큼 진부령으로 향하는 길은 인제와 고성 쪽을 합해 16㎞에 이를 정도로 구절양장 굽잇길을 풀어놓는다. 진부령을 넘었다고 해서 고개를 넘은 것이 아니다. 진정한 고갯길은 따로 있다.
소똥령. 이름만 들어도 입가에 웃음이 흘러나온다. 고성군 간성읍 진부리와 장신유원지 사이에 있는 높지 않은 고개다. 이 고개를 넘어가는 약 3.4㎞의 트레킹 코스는 천연 그대로의 숲길로 생태의 보고(寶庫)이다.
소똥령의 본래 이름은 소동령(小東嶺)이다. ‘작은 동쪽 고개’라는 뜻이다. 하지만 백두대간의 고개 중에서 작다는 뜻이지 결코 만만히 볼 게 아니다. 미시령과 한계령에 비해 경사가 비교적 낮은 진부령에서 간성읍 방향으로 길을 따라가면 나온다.
이름의 유래도 재미있다. 소똥령은 옛날 국도1번지로 한양가던 길이었다. 청운의 꿈을 품은 선비가 괴나리봇짐 메고 과거 보러 가던 길이기도 하고 소와 비단을 물물교환하기 위해 넘다가 산적을 만나기도 했던 고개이다. 사람들이 하도 많이 지나다녀서 자연적으로 길이 파여 생긴 소똥 모양의 봉우리 때문에 소똥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과 고개 정상에 주막이 있었는데 원통장으로 팔려가는 소들이 주막 앞에다 똥을 많이 누어 소똥령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연유가 무엇이든 소똥령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해학적이고 진한 고향의 향기는 포근하고 정겹다.
진부령에서 간성으로 가다 만난 ‘소똥령 입구’라는 안내판을 따라 숲길로 들어서자 북천계곡을 가로지르는 길이 58m, 폭 1.5m의 구름(출렁)다리가 기다린다. 다리를 건너면 가을색을 잔뜩 머금은 숲 내음이 코끝으로 전해져 온다. 꼬불꼬불 시나브로 옛 고갯길로 들어서자 조그만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에 오색찬란한 단풍이 반영을 드리운다. 이내 물소리와 함께 붉고 노란 빛으로 치장한 단풍나무가 반갑게 손짓을 한다. 햇살을 받은 단풍은 황홀한 빛을 발한다. 눈이 호강한다. 손으로 만지면 온몸이 붉게 물들 것만 같다.
소똥령 제1봉우리에 오를 때까지 길은 가풀막을 이어간다. 20여분을 오르자 ‘소똥봉우리’라는 푯말이 앞을 가로막는다. 옆에 봉긋한 한 무더기의 흙무덤이 ‘내가 소똥봉우리요’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소똥령의 유래가 됐다는 봉우리가 길가에 앙증맞게 자리잡고 앉아 탐방객들에게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이후 계곡을 벗어난 길가의 숲은 고요하다. 태곳적 적막감 속에서 한 여름 초록빛 옷에서 색동저고리 같은 새옷을 갈아입고 곱디고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다. 정상으로 다가갈수록 숲은 더욱 원시적으로 울창하다.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는가 싶더니 이내 열어 푸른 하늘을 내려놓는다.
원래 길은 산으로 곧바로 치고 오르거나 경사진 곳을 지났다. 지난해 고성군이 이 구간에 지그재그로 새길을 만들고 난간줄을 설치해 위험을 줄이고 힘도 덜 들게 했다. 그 길을 따라 느긋하게 오르자 1시간여 만에 소똥령(제1봉)정상에 섰다. 아름드리 굵직굵직한 나무들 사이로 간이 나무의자가 힘들게 올라온 발걸음에 쉼을 내준다.
이제부터 길은 능선을 따라 오르내리며 4봉까지 이어진다. 봉우리 위에는 멧돼지가 땅을 헤집어 놓은 흔적이 뚜렷하다. ‘산적(山賊)’이 아닌 ‘저적(猪賊)’이다. 봉우리 사이가 짧아 시간은 20분도 안 걸린다. 4봉을 내려서다 보면 ‘칡소폭포 소리 들리는 곳’이라는 색다른 푯말이 반긴다. 발 아래 흐르는 북천계곡의 물이 우렁차다. 폭포를 찾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폭포는 마을로 향하는 길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웅장한 굉음에 이끌려 칡소폭포로 내려선다. 예전엔 고급관료들이 비밀스레 자주 찾아와 신선놀음을 많이 했다고 한다. 높이 3m에 불과한 폭포는 엄청난 물을 쏟아내며 주변의 단풍과 함께 수려함을 자랑하고 있다.
어느새 도착한 소똥령마을. 산 아래 해발 300∼400m에 아늑하게 자리한 마을 이름에 정감이 간다. 소 캐릭터가 귀엽게 자리 잡고 장승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다. 마을 주변에 물이 풍부해 칡소, 멍덕소, 명주소, 소팽이골 등 크고 작은 계곡이 많다. 하루 정도 느긋하게 머물수 있는 펜션부터 농촌체험관, 자연생태체험학습장, 교육농장 등 다양한 볼거리 체험거리가 가득하다.
속도전이 만연한 시대에 문명의 속도를 내려놓고 ‘느리게 가는 시간’과 ‘손대지 않은 풍광’에 빠져들면 새로운 삶이 동행한다. 좁고 굽어진 옛길을 뒷짐 지고 느릿느릿 걷다 보면 어머니의 품처럼 온기와 생명감을 주는 아름다운 자연이 도시의 삶에 찌든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그리고 생각을 안겨준다. 사람살이 있는 곳에 길이 생기고, 그 길에는 말 못할 사람들의 애환이 스며있다는 것을.
여행메모
진부령 넘어 5분 거리 ‘소똥령 입구’… 고성 특산품 명태요리 정갈·푸짐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가면 서울∼동홍천고속도로를 이용, 동홍천요금소를 통과한 뒤 성산교차로에서 오른쪽 속초·인제 방면으로 44번 국도를 이용해 간다. 인제를 지나 한계교차로에서 ‘간성(고성), 속초’ 방면으로 좌회전해 46번 국도로 갈아탄 뒤 용대육교에서 진부령 방면 오른쪽 길을 선택한다. 진부령을 넘어 고성 방향으로 5분가량 내려가면 오른쪽에 ‘소똥령입구’ 표지판이 나타난다.
소똥령마을은 여기서 5분 정도 더 내려가 장신유원지로 들어가면 된다. 장승·솟대 만들기, 전통음식만들기, 천연염색, 산채 채취하기, 옥수수따기, 감자캐기, 밤줍기, 송이 채취하기 등 다양한 체험을 농촌전통테마마을이다.
주변에 우리나라 최북단 사찰인 건봉사가 있고, 송지호·통일전망대·청간정·화진포 등도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다.
강원도 고성이 자랑하는 음식 가운데 지역의 특산품인 명태요리를 빼놓을 수 없다. 죽왕면 오호리 ‘고성명태 한수위’(033-633-4499)는 명태코스요리, 명태지리 등을 정갈한 반찬과 함께 푸짐하게 내놓는 맛집으로 유명하다.
고성·인제=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