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 얘기 좀 해요-문화계 팩트체크] 습작생들에게 ‘유령의 권력’?

입력 2016-11-01 18:21 수정 2016-11-21 17:15

Q : 문학출판사 문학과지성사(이하 문지)가 억울하다. 최근 남성 문인들의 성폭력 고발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가운데 유독 문지에서 시집을 낸 시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어서다. 일련의 사태는 우연의 일치인가, 보이지 않는 권력의 그림자가 작용하는 것일까.

A : 성추문 고발 사태로 사과하거나 활동 중단을 선언한 문인들은 박범신(70) 소설가, 배용제(53), 이준규(46) 시인, 박진성(38) 시인 등이다. 박 작가를 제외하면 모두 시인이다. 이들은 문지에서 시집을 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를테면 배 시인이 ‘다정’(문지) ‘이 달콤한 감각’(문지) ‘삼류극장에서의 한 때’(민음사)를, 이 시인이 ‘네모’(문지) ‘흑백’(문지) ‘반복’(문학동네)을, 박 시인이 ‘식물의 밤’(문지) ‘목숨’(천년의시작)을 출간했다.

이들은 문지에서 운영하는 ‘문지문화원 사이’ 등 강의 뿐 아니라 사적인 시 창작 강의를 매개로 습작생들에게 성희롱·성추행은 물론 강압적인 성관계나 금품갈취도 서슴지 않았다. 논란이 일자 출판사가 문제 시인들의 근작 시집에 대해 출고정지를 결정하거나 ‘문지문화원 사이’ 강의를 폐강하는 등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그만큼 부담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성폭력은 교수와 제자, 상사와 직원 등 권력관계가 작동할 때 벌어진다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어떻게 시집 몇 권을 낸 이력만으로 느슨한 계약관계인 사설 아카데미 혹은 개인 교습을 통한 ‘갑질’이 통할 수 있었을까.

근본적으로는 시인 개개인의 품성과 자질 문제다. 그럼에도 문지에서 시집을 냈다는 사실이 하나의 권력으로 작동할 수 있는 문단의 구조를 지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선 문지 시집이 갖는 아우라다. 1979년 1호가 나온 문지 시선집은 최근 491권째인 이혜미 시인의 ‘뜻밖의 바닐라’를 냈다. 앞서 1975년 1호를 낸 창비 시선집(403권)의 발행 권수를 능가한다. 80년대 나온 민음사와 실천문학, 90년대 나온 문학동네가 따라갈 수 없는 권위가 있다. 문지 시선집에는 이성복, 기형도, 황지우 등 고전이 될 만한 시선들이 있어 아우라가 강력하다는 게 게 문단의 평가다. 특히 문지 시집이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창비나 실천문학의 시집과는 다르게 개인의 내면 문제를 위주로 해 요즘 젊은층에게 어필한다는 지적도 있다.

A시인은 31일 “시 공부하는 문청들이 압도적으로 선호하고 욕망하는 대상이 문지 시집이다. 시집의 최상층에 문지 시집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교보문고의 시집 매대에 가보라. 문지 시집이 10권이면, 창비 시집은 겨우 3권 깔려 있다”고 강조했다.

사정이 그러다보니 문지에서 시집을 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청들에게 눈부신 권력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타 시인들을 추종하는 일종의 팬덤 현상도 작용한다. B시인은 “습작생들은 기성 시인들을 연예인처럼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책으로 접하던 시인을 실제 만나면 다른 종류의 호감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문지 출신 시인들만이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시 창작 강의를 할 수 있는 배타적 문화도 ‘그림자 권력’을 키우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C시인은 “제가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강의를 못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 시집을 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시집 출간을 결정하는 것은 문지 편집위원들이다. 따라서 이들 시인이 이곳에서 시집을 낸 만큼 등단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도 작용할 수 있다. 최근 월간 시 전문지인 ‘현대시학’이 시 창작 강의를 통한 등단 부정청탁 논란에 휘말리며 ‘시인 권력’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주일우 문지 대표는 “문지 출신 시인들이 성 추문에 연루돼 당혹스럽다. 하지만 이는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시집 발간은 편집위원들이 정기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며 객관성을 강조했다. 문지는 편집위원인 모씨가 교수로 재직 중인 특정 대학 출신의 시집이 유난히 많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글=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삽화=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