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조준 <3> 인민군과 전투 중 “살려주시면 하나님께 헌신”

입력 2016-11-01 21:13
6·25전쟁 당시 월남한 피난민들이 거주하던 부산 영도의 한 판자촌 풍경. 부산 용두산 자락 판자촌에서 살던 박 목사는 궁핍했던 당시 경험을 축복으로 여겼다. 사진은 작가 정인성의 ‘영도, 1952’.정 작가 가족 제공

식구 아홉에 남자는 할아버지와 나 둘뿐이었다. 나머지는 증조모와 할머니, 어머니, 삼촌어머니(작은 어머니의 북한식 표현), 내 여동생, 사촌 누이 동생들이었다. 모두 여자였다.

할아버지가 와병 중이라 농사를 지으려면 일손을 빌려야 할 형편이었다. 간신히 식구들이 먹고 살 정도의 생활이었다. 이래저래 여유가 없었다. 집이 훼손되어도 수리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부엌 지붕 한 모퉁이가 내려앉았는데 형편이 여의치 못해 고치지 못하고 비만 새지 않도록 짚으로 막아놓은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때쯤 어린 내 마음 속에서는 ‘우리 집안을 내가 세워야지’ 하는 생각이 다짐으로 바뀌었다. 집안을 일으키려면 우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아야겠다는 각오로 공부에 매진했다.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머리가 특별히 좋은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남보다 갑절로 노력하니까 뒤지지 않았다. 학창 시절, 밤새워 공부한 적은 없지만 자투리 시간을 버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왕복 2시간 걸리는 등·하교 길은 외국어 단어 외우는 시간으로 사용했고, 학교 쉬는 시간에도 책을 폈다. 그 무렵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놀라운 결과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등학생 때 남한으로 피난을 오게 됐다. 피난 도중에는 먹을 것이 없어 당시 서해안에서 모집하는 을지병단에 입대했다. 서해안의 용매도 볼음도 백령도 연평도를 두루 지키는 것이 부대의 임무였다. 환경이 워낙 열악해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내 평생 그때만큼 고생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을지병단이 유격대였는데 정식 보급이 없으니까 거의 자급자족을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용매도에 있을 때는 쌀을 구하려고 황해도 연백 지역에 상륙했다가 인민군과 마주쳐 120명 중 100명이 전사했다. 생존자는 20명. 그 중에 내가 포함됐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 약속했다.

“하나님, 저를 살려 주시면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살려주셨고 나는 ‘목사’라는 외길 인생을 살고 있다. 인천과 부산을 거쳐 피난민 생활을 하면서 남들이 하는 고생은 다 해 봤다.

집을 마련할 돈이 없어 부산에서는 북한 피난민의 밀집지역인 용두산 자락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전기는커녕 수도도 없이 구공탄 불로 밥을 지어 먹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 할 수 없이 열악한 삶이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다 같은 처지였기에 ‘사는 게 이렇지’라고 생각하며 불평하거나 불행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고단한 피난민 생활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 하나하나의 경험이 나에게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중에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을 빼고 국제시장에서 멸치 장사를 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광복동 거리에서 자판을 벌려 카바이트 등 밑에서 땅콩도 팔았다. 그렇게 공부해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상경해서는 입주 가정교사를 하면서 대학에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대학시절 나는 공부 밖에 몰랐다. 극장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 사람들은 할 일이 저렇게 없을까’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