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A대기업 강당. 통 속에 있는 번호표를 뽑는 직원 100여명의 손은 떨렸다. 뽑은 번호를 본 뒤 안도의 환호와 실망의 한숨이 교차했다.
이날은 이 회사의 내년 직장어린이집 입소자 추첨을 한 날이다. 전체 경쟁률은 3대 1 정도였지만 연령별 정원이 다른 탓에 피부로 느껴지는 체감 경쟁률은 더 높았다. 정원 안에 드는 번호를 뽑아 느긋한 직원들과 달리 뒤쪽 번호가 나온 직원들은 기약 없는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데 만족해야 했다.
추첨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지만 그나마 이 회사 직원들은 직장어린이집 문을 두드려볼 수 있는 기회라도 잡아봤다. 상당수 회사들은 직장어린이집조차 없다.
31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직장어린이집 설치 의무 사업장(상시근로자 500인 이상, 여성근로자 300인 이상) 1143곳 가운데 538곳이 설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사업장 유형별로 보면 학교가 21.0%로 이행률이 가장 낮고, 기업이 48.4%로 그다음이었다. 복지부는 538곳 가운데 직장어린이집을 설치 중인 사업장, 신규 사업장을 제외한 178곳과 조사에 응하지 않은 146곳의 명단을 공표했다.
미이행 사업장의 명단 공표는 4년째지만 올해부터 처벌이 뒤따른다. 지난해 9월 개정된 영유아보육법 시행령에 따라 미이행 사업장은 최대 ‘연간 2억원’의 이행강제금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명단 공표 후 6개월이 지났는데도 이행강제금을 부과 받은 회사는 한 군데도 없다. 관련법에는 1, 2차 이행명령을 내린 후 이행강제금을 부과토록 하고 있는데, 현재 153개 사업장에 1차 이행명령만 내려진 상태다.
이는 관련법에 각 이행명령을 내리는 시기를 구체적으로 못 박지 않고 ‘상당한 기간’으로 표현한 것과 무관치 않다. 복지부는 지난 6월 각 지방자치단체에 미이행 사업장을 통보하면서 3개월을 기준으로 이행명령을 내리도록 권고했다. 복지부 보육기반과 관계자는 “일부 지자체에서 2차 이행명령을 내린 곳도 있지만 대부분 1차 이행명령만 내린 상태로, 내년 초는 돼야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는 사업장이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이행강제금 규모가 크지 않아 구속력이 크지 않다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에서 이행강제금 부과마저 느리게 진행돼 제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대부분 사업장이 ‘버티기’로 일관하다 이행강제금 부과를 앞두고 ‘위탁보육’ 방식을 선택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의무사업장의 경우 직장어린이집 설치 외에 외부 어린이집에 일정 비율 이상을 위탁하면 의무 이행으로 쳐준다. 이렇게 되면 ‘일과 생활의 균형’이라는 직장어린이집 설치 목적과 멀어지게 된다.
육아정책연구소가 지난해 보육실태를 조사했더니 직장어린이집에 대한 만족도는 5점 만점에 4.36점에 달했다. 부모가 양육을 전담하는 것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만족도였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
미이행 사업장 공표 6개월… 직장어린이집 이행강제금 부과 ‘0건’
입력 2016-11-01 0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