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이 한명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평양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함경남도 북청에서 교사로 일하셨다. 그런데 당시 만주 지역을 휩쓸던 열병에 걸려 2명의 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때 삼촌의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할머니가 뜰에서 일을 하고 계셨는데, 우체부가 전해 준 전보를 받아 보시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시면서 아무 말씀도 못하신 채 땅에 뒹구시는 게 아닌가. 꽃다운 나이의 아들을 둘이나 잃으셨으니 비극 중의 비극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 집은 예수 믿다가 망했다”고. 할머니는 사람들이 부끄러워 한 달 이상 교회를 나가시지 못했다. 거의 매일 목사님이 심방을 오셨는데 나중에 할머니 말씀이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데 귀가 멍해서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고 토로하셨다. 얼마나 힘드셨으면 그랬을까.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아, 우리 집안은 이렇게 망하는구나. 그러면 나는 앞으로 뭘 하지? 내게 남은 건 하나님뿐이다. 목사가 되자.’ 어려서부터 목회자가 되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래서 초등학생 시절부터 목사님 설교를 받아 적느라 애쓴 기억이 새롭다. 그런데 그 설교노트마저 1·4후퇴 피난 때 두고 나왔다.
독립운동에 참여하셨다가 여러 해 옥고를 치르신 할아버지는 병을 얻어 말년에 고생이 많으셨다. 할아버지는 한가한 시간이면 집 뒤 뜰 살구나무 밑 정자에서 퉁소를 부시곤 했다. 찬송가 ‘천부여 의지 없어서’와 같은 곡조였다. 나는 그 노래가 당시 일본식 졸업가인 줄 알고 따라 부르곤 했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일제 압제에서 벗어난 날, 할아버지는 학교 운동장에 모인 동네 사람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셨다. 그런데 그 애국가 곡조가 바로 할아버지가 퉁소로 부시던 곡조와 같은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노래가 우리나라 애국가였구나.’
일제 때 일본인들은 삭발을 강요했지만 할아버지는 따르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일본 정부 시책에 대한 무언의 항거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나는 할아버지의 항거가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 그 항거의 정신을 닮고 싶었고 그렇게 살고 싶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2∼5)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향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해 말한 내용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나아가 목회자의 삶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그 길에서 돌아서고 악에 대해 항거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삶 속에서도 할아버지가 지닌 항거의 정신, 그 피가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 같다. 불의한 것을 보면 그대로 넘어가기 힘들다. 그래서 나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불의한 일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잘못된 일임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일처럼 지나치면 사사건건 부딪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미움도 받고 손해도 종종 본다. 그러나 내 마음은 편안하다. 담대하다. 부끄럽지 않다. 할 일을 마땅히 한 것 같아 후회하지 않는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역경의 열매] 박조준 <2> 삼촌 열병으로 세상 뜨자 “저 집은 예수 믿다가 망했다”
입력 2016-10-31 2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