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주의 1318 희망공작소] 뜻이 있는 성실함

입력 2016-10-31 20:42

“요즘 아이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 자체가 없는 것 같아요.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요.”

교회 소그룹 모임에서 중학교 국어 교사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했다. 학생들이 소설 ‘꺼삐딴 리’를 읽고 쓴 독후감의 내용 때문이었다. 상당수 아이들이 ‘주인공처럼 노력하며 살겠다’ ‘끊임없는 변화를 향한 주인공의 노력을 존경한다’는 내용을 독후감으로 썼다는 것이다.

‘꺼삐딴 리’는 1962년 전광용 작가의 소설로 주인공 ‘이인국’이 일제강점기와 이후 혼란기의 역사 전환기를 모두 거치면서 뛰어난 처세술로 변신해 살아남는 이야기를 풍자한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여러 청소년들과 이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 아이들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성공하기 위해서 일본어로 잠꼬대를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 등이 묘사되었는데 아이들은 이러한 주인공의 성실함에 초점을 두고 본받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춘기는 개인의 가치관, 세상을 보는 시각의 전반을 형성해나가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어떤 생각을 하고 경험을 하는가에 따라 세상과 인생을 보는 시각이 변화하고 평생 좌우할 자신만의 가치관을 점차적으로 형성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교과서 내용이나 부모의 가르침과 같은 소수의 사건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접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에서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받는다. ‘꺼삐딴 리’ 작품에 대한 아이들의 존경 반응은 이러한 광범위한 영향 하에서 해석돼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내적 가치보다 성공이라는 외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런 가치가 가정에도 그대로 녹아있고 아이들은 그것을 그대로 내면화해 자신의 가치관으로 형성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자기계발과 성실함, 그로 인한 성공과 생존이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니다. 여러 정권, 심지어 나라가 바뀌는 와중에도 고위관직을 유지한 다니엘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다니엘의 경우 ‘뜻을 정한 후에(단 1:8)’ 모든 행동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소설 속 이인국과 다르다. 뜻이 가장 우선이었기 때문에 그 뜻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다니엘은 성공과 생존을 뒤로 하고 뜻을 지키는 행동을 할 수 있었다(단 6:10).

뜻이 없는 자기계발, 방향이 잘못된 성실함은 아무리 당시에 성공적이라 하더라도 사실상 가장 악한 것일 수 있다. “나는 나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항변한 정치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실상은 수많은 유대인들을 가스열차 안에서 죽게 만든 전범자인 것처럼 말이다.

왜 이인국이라는 인물을 비판적으로 봐야하는지, 과연 생존과 사회적 성공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지 아이들과 진지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사회를 지탱하는 기준 자체가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또 한 명의 이인국과 아이히만으로 살고 있지 않은지 어른들부터 먼저 돌아볼 시간이다. 그리고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는 작업을 아이들과 함께했으면 한다.

한영주 <한국상담대학원대 15세상담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