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이었다. 그는 서울시 교통국장, 나는 서울시 출입기자 때였다. 기자들은 지금의 종로구청 자리에 있던 교통국장 방을 자주 찾았다. 그는 교통 분야는 물론 시정(市政) 전반의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설명했고, 예의 따뜻한 얼굴로 늘 기자들을 환대했다. 탁월한 업무능력, 온화한 성품, 기자들의 후한 점수까지 받은 그가 관료로 승승장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서울시를 떠나 청와대 내무행정비서관을 거쳐 마침내 관선 서울시장과 민·관선 포함 세 번의 충북지사를 역임했다. 서울시 공무원들이 꼽는 역대 최고의 시장에는 고건 전 총리와 함께 늘 이원종이 꼽혔다.
10여년의 공백을 거쳐 그는 지난 5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오랜만에 접하는 근황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의아했다. 지방행정만 경험했던 70대 중반의 그와 대통령 비서실장 자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왜’라는 물음과 ‘제대로 할까’라는 걱정이 교차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염두에 둔 포석이란 세간의 평까지 나온 터였다.
5개월여가 지난 지금 이 실장은 속된말로 ‘떡’이 됐다. 대통령 비서실장이란 자리가 무색할 만큼 청와대에서 겉돌고 있음이 확인됐다. 실세 수석비서관과 ‘문고리 3인’의 위세에 눌렸는지 명색 비서실장이면서 대통령 지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최순실 스캔들’이 나라를 뒤덮고 있음에도 해법 모색은커녕 ‘허수아비 비서실장’이란 비아냥의 대상이 됐다. 나이 탓일까. 명철한 행정 관료였던 그의 판단력도 고장이 난 것 같다. ‘대통령도 피해자’라며 불이 난 민심에 기름을 끼얹었고 파문의 중심에 있는 수석비서관과 비서관을 옹호해 국회의원들의 질타를 받았다.
이 실장은 자서전에서 외할머니가 어릴 때 자신을 ‘알쫑이’로 불렀다고 했다. 야무지고 알차게 살라는 축복의 의미가 담겼다는 것이다. 그가 외조모의 바람대로 알쫑이가 되는 길이 있다. 하루빨리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혹 ‘사태 수습’을 의식한다면 착각이다. 그건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다. 빨리 나올수록 ‘행정의 달인’이란 명성에 그나마 먹칠을 덜하게 된다.
글=정진영 논설위원, 삽화=이영은 기자
[한마당-정진영] 이원종 비서실장과 ‘알쫑이’
입력 2016-10-28 1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