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형님의 영향을 받은 여자 가수다. 매우 독특한 음색을 갖고 있으며, 아주 차분한 노래는 사람들의 넋을 나가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는 그런 가수다.”
가수 조용필과 산울림, 유재하 등과 함께 1980년대 청년문화를 이끌었던 들국화의 전인권(62)이 자신을 깜짝 놀라게 한 가수라고 칭찬한 말이다.
전인권이 ‘넋을 나가게 하는 이’라고 극찬한 가수는 채은옥(61). 가을에 생각나는 목소리 주인공이다. 그는 ‘차라리 돌이되리라’ ‘지울 수 없는 얼굴’ ‘사랑할 줄 모르고’ 등 적잖은 히트곡을 남겼다.
하지만 구슬프고 애절한 목소리로 흐느끼듯 절규하듯 노래해 듣는 이의 가슴을 흔드는 노래는 아마도 1976년에 발표한 데뷔곡 ‘빗물’(김중순 작사·작곡)이라 할 수 있다.
“조용히 비가 내리네/ 추억을 말해주듯이/ 이렇게 비가 내리면/ 그 사람 생각이 나네….”
이 곡은 당시 국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히트했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시적인 가사에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를 얹힌 빗물은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였다. 이듬해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활동을 접어야 했다. 대법원에서 무혐의 판결을 받았지만 7년이란 세월을 입 다물고 살았다. 명예를 회복한 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 이민을 준비했으나 갑작스럽게 결혼하는 바람에 한국에 눌러앉았다.
그런데 결혼생활은 10년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그리고 홀로 아들을 키우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아들이 사춘기 시절 말을 잘 안 들어서 어머니의 속을 까맣게 태웠다.
나는 가수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 교회 십자가를 보고 예배당을 찾은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말썽꾸러기 아들이 엄마를 기독교인으로 만든 것이었다. 채은옥은 어머니로서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들이 이러나 싶어서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엄마로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미션스쿨 보성여고 나온 것이 도움이 됐어요. 찬송가도 어느 정도 익숙했거든요. 교회에 나가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어요. 아들도 자원입대, 최전방에서 복무하고 제대하더니 변하더군요. 군대는 꼭 갔다와야겠더라고요(웃음).”
27일 여의도순복음교회 건너편 한 식당에서 만난 채은옥이 그렇게 말했다.
채은옥은 이때부터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뜨거워졌다고 했다. 서울 온누리교회와 갈보리교회에서 신앙훈련을 받고 9년 전부터는 경기도 하남시 풍성한교회(윤장희 목사)에 출석한다. 권사 직분으로 예배드리며 기도하고 찬양하는 생활에 몰입하고 있다.
“노래는 20년 전에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남들이 왜 노래하지 않느냐고 하면 그냥 하기 싫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실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어요. 왜 그런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고 살았어요. 가수가 목소리가 안 나온다는 것은 죽은 거나 다름없는 것이죠.”
벙어리 냉가슴 앓던 그에게 윤장희 목사의 한마디가 목소리를 되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나님은 천사처럼 찬양을 부르는 사람을 제일 좋아하신다”는 말씀이었다. 채은옥은 곧바로 교회 시온찬양대에 들어가 찬양에 몰입한 결과 예전의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2012년에는 3년 동안 작업한 CCM 음반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내놓기도 했다.
그는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메시지로 70년대 후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 허스키 발라드를 불렀다. 왕년엔 스타였지만 요즘 20, 30대에겐 낯설다. 하지만 중장년층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가수다.
목소리는 잘 변하지 않는 법인데 신기한 일이다. 원래 그의 매력은 허스키하고 애잔한 음색이 아닌가. 그런데 최근 그가 부르는 노래에선 ‘빗물’이 주던 그 허스키는 어디로 갔는지 들리지 않는다. 지난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헌정 음반에 수록된 ‘아프다’와 최근에 나온 싱글 앨범 ‘고마워요’ ‘입술’에선 만날 수 없다.
일생에 단 한번, 은혜의 기념 콘서트
“저도 참 신기했어요. 디지털 기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냥 맑기만 해요. 예전의 맛이 사라졌다고 팬들이 싫어하면 어쩌죠.”
그가 마침내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연다. 다음 달 2일 오후 7시30분 서울 삼성동 백암아트홀 무대에 선다. 그는 이번 4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빗물’(1976)과 ‘어느 날 갑자기’(1983) ‘지울 수 없는 얼굴’(1985) ‘아프다’(2015) ‘고마워요’ ‘입술’(이상 2016) 그리고 복음성가 등 20여곡을 부를 예정이다.
“처음엔 싫다고 했어요. 부를 노래도 마땅찮고, 보여줄 것도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듀엣 가수 ‘현이와 덕이’ 전 매니저였던 김철한 아트인터내셔널 대표가 40주년 기념 음악회는 일생에 단 한 번이지 않느냐고 설득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허락했어요.”
그는 막상 기념 콘서트를 결정하고 나니까 걱정이 태산이란다. 성격상 대충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의 팬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채은옥의 원칙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부친의 엄격한 교육을 받아서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없다고 했다. 유혹의 손길이 수시로 뻗치는 연예계에서 스캔들 없이 지내온 것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언제나 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훈육 덕분이라고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날 찾아온 그님에게 사랑을 배웠네/ 세월이 갈수록 내 가슴 속에는/ 그님의 사랑 깊어가네….” 채은옥은 자신이 부른 ‘어느 날 갑자기’가 신앙고백이라고 했다.
가을밤을 포크의 선율로 물들일 공연장은 400석 규모다. 채은옥은 “욕심 없다. 400석을 바라지 않는다. 100석만 차도 감사할 것”이라며 “그날 자리에 오는 팬들에게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40년 지기 가수 유익종과 국내 최고 블루스 기타리스트 김목경도 힘을 보탤 것이라고 했다. 전영록은 최근 채은옥에게 신곡도 선물했다. 최백호도 곡을 주기로 약속했고 주위에서 많이 도움을 줘서 매우 고맙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채은옥은 40주년 공연에서 들려줄 대표곡 ‘빗물’은 20세에 불렀던 것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했다. 그땐 그냥 빗물을 노래했지만 이번엔 ‘하나님의 눈물’을 들려주겠다고 했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빗물…눈물…등불… 기쁜 하나님 눈물
입력 2016-10-28 20: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