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크리스천에게 일상화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서’라는 종교개혁의 3대 신조는 500년 전 중세교회를 뒤흔들었던 혁명적 뇌관이었다. 천부적 성직권은 와해되고 누구든지 신의 대리인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만인사제직’이 현실화되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마 16:16∼19)에 근거한 교황제 교회의 절대 권위는 3대 신조에 의해 상대화되고 개인화되었다.
전례(미사와 7대 성사 등)와 상징체계(성당건축, 성화, 성인의 축일 등)는 말씀중심으로 간소화되거나 부정되었다. 종교개혁이 진행됨에 따라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회중교회 등의 다양한 교파가 형성되면서 종교개혁가들이 견지하고자 했던 프로테스탄트의 정체성은 ‘한 번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였다.
‘만인사제직, 설교중심의 예전, 언제나 개혁하는 교회’ 등이 중세교회와 구별되는 개혁교회의 특성이자 신학적 기제라면, ‘직업소명(calling)’은 세속적 삶과 일상에 조명된 윤리적 기제라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명령과 부르심에 따른 천직으로 재조명되었고, 노동은 원죄의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거룩한 활동으로 바뀌었다.
루터가 독일어 성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처음 사용한 ‘Beruf(직업·소명)’의 개념은 수도원의 은둔적 금욕주의보다 세상 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직업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것이며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막스 베버가 분석했듯이 프로테스탄트의 근면하고 금욕적인 노동의무는 전문화된 노동 분업을 윤리적으로 정당화시키고 나아가 성공적인 이윤창출이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되는 자본주의의 합리화와 발달에 기여했다.
이러한 16세기 종교개혁이 가져온 교회와 신앙의 패러다임적 전환을 가볍게 바라볼 수는 없지만, 일과 삶이란 여가적 관점에서 단편적으로 들여다보면 작은 긴장과 함께 아쉬움도 있다.
성서를 재발견함으로 교권주의로부터 해방을 가져온 종교개혁은 ‘하나의 교회’가 제공하는 수동적 안정성이 아닌 ‘오직 성서’의 토대위에 언제나 개혁해야하는 능동적 불안정성을 택함으로 개인의 삶과 신앙공동체를 역동적으로 전환시켰다.
하지만 개혁교회가 ‘오직 성서’라는 능동적 불안정성을 간과할 때 중세교회가 범했던 수동적 안정성이라는 유혹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다. 사제이자 노동자로 부름 받은 개인은 성서를 통하여 그리고 성실한 노동으로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는 성찰적 신앙생활을 요구받게 되었다. 하지만 성서에 대한 진지한 묵상과 전인적 실천은 쉬운 일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종교개혁으로 노동이 금욕적 신앙의 방편으로 중시되자 노동에 대한 긍정성은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사회문화와 개혁주의 신앙에서 쉼과 여가의 가치를 주변화 시켰다.
창세기의 안식일과 복음서의 하나님 나라 비유에서 우리의 삶은 일과 쉼과 여가의 균형과 리듬으로 이루어짐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 또한 직업소명을 넘어 일과 쉼과 여가의 통합적 ‘삶의 소명’을 말씀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우리가 함께 성찰할 이슈중 하나는 ‘직업 소명’을 넘어 ‘삶의 소명’이 되길 소망한다.
옥성삼 <크로스미디어랩 원장>, 정리=유영대 기자
[옥성삼의 일과 안식] 종교개혁에 대한 여가적 단상
입력 2016-10-28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