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은 무릎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주의 종들이기에 섬기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 성도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낙타무릎을 자랑한다. 기도하기 위하여, 섬기는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그리고 겸손과 순종의 상징으로…. 옳은 일이다. 그래서 야고보가 자랑스럽고, 마르틴 루터가 위대하고, 요한 웨슬레가 존경스럽다. 기도하는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 리빙스턴이나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이야기하는 조지 뮬러가 훌륭한 인물로 평가받는 것도 모두 바로 그들의 꿇는 무릎 때문이다.
그러나 무릎도 꿇어야 할 자리가 있고 피해야 할 자리가 있다. 조선시대의 병자호란 때에 지조와 의리로 조선 선비의 기개를 드높인 삼학사(三學士) 중에 청나라에 잡혀가 순절한 화포 홍익한(1586∼1637)이라는 이가 있었다. 32세의 젊은 윤집이나 29세의 오달제와는 달리 화포의 나이는 51세였다. 남한산성에서 포박을 받고 심양으로 끌려간 그는 청나라의 임금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오히려 춘추대의를 이야기하며 “조선의 신하인 내가 청나라 오랑캐 앞에서 무릎을 꿇겠느냐?”고 꾸짖자 바로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물론 후세에 그에게는 충정공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다.
성경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세미한 소리 가운데 말씀하신다.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대답한다. “내가 만군의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를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 19:12∼14) 바로 그때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된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칠천 명! 바알에게 입을 맞추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기시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주의 종들이다. 그의 제사장들이며,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자녀들이다. 겸손과 섬김, 순종과 기도의 무릎은 수천 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렇지만 어디든지 가서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비록 신분이 종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아무 앞에서나 무릎을 꿇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영의정이 거느리는 하인이 판서대감 앞에서 함부로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은 주인의 존귀함을 알고 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국가적으로 막중한 소임을 맡은 대사(minister)는 나라의 큰 심부름꾼이기 때문에 언제나 주인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 임무를 부여한 사람이 왕이나 대통령이든 아니면 고국에 있는 국민이라도 마찬가지다. 그의 무릎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 주인의 것이다. 맡은 일이 크거나(大使) 작은 것(小使·옛날에는 학교나 관공서에 소사제도를 두었음)과는 상관이 없다. 종의 무릎은 언제나 주인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종이라고 하는 직분자들이 어디에서나 무릎을 꿇고 있다는 사실이 다. 겸손과 섬김, 순종과는 무관한 곳에 가서 허리를 굽힌다. 물질과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작은 즐거움이나 보잘 것 없는 개인적인 이득을 얻기 위하여 고개를 숙인다. 존귀한 성도로서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 물론 교만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의정의 종이라고 하면서 도도하게 처신하는 것만큼 꼴불견도 없고, 잘난 체하거나 있는 체하거나 아는 체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
자신의 신분이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폄훼를 당하고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이유이다. 지금 우리가 고개를 숙이며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있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분별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아무리 개혁을 논하고 거룩함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것은 단순한 구호에 그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손윤탁 <남대문교회 담임목사>, 정리=윤중식 기자
[손윤탁 칼럼] 무릎도 가려가며 꿇어야 한다
입력 2016-10-28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