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바뀌고, ‘저녁 있는 삶’이 다가왔다. 시행 한 달이 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이 낡은 관행을 하나씩 없애고 있다. 잦은 술자리, 빡빡한 약속 대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저녁식사 자리도 짧아졌다.
하지만 호의와 부정한 금품의 모호한 경계, 광범위하면서 불분명한 규정 등은 혼란을 유발하고 있다. 정부정책을 입안하는 공무원의 ‘고립’, 화훼·외식업계의 매출 급감 등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각종 오해와 불편, 부작용을 개선하는 후속작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적응하면서 ‘긍정 평가’ 늘어
김영란법은 27일로 시행 한 달을 맞았다. 공직사회에선 법 시행 전에 ‘현실에 맞지 않는 법’이라는 불만이 팽배했다. 하지만 지금은 긍정적인 평가가 늘었다. 예산 심의를 할 때면 몰려드는 민원인 때문에 피로를 호소했던 기획재정부 예산실은 김영란법을 반긴다. 예산실의 한 과장은 “당장은 불편해도 공무원이나 민원인 모두 부담 없이 일처리를 할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라고 말했다.
특히 젊은 공무원들은 ‘저녁 있는 삶’에 만족감을 표시한다. 그동안 중앙부처 공무원들은 국회 보좌관부터 부처·기관 사람들과 점심·저녁 약속이 많았지만, 이젠 약속을 잡는 전화가 뚝 끊겼다. 국토교통부의 한 사무관은 “업무 때문에 매일 일찍 들어가긴 힘들지만 술 취해 집에 들어가지 않으니 아내가 좋아한다”고 말했다.
청탁이 많은 공공기관도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 대학병원에서 행정직으로 일하는 A씨(30)는 “청탁 자체가 없어지진 않았지만 거절할 수 있는 근거가 확실히 생겼다”면서 “선물은 뚝 끊겼고 입원 진료날짜를 앞당겨달라는 부탁은 모두 거절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선 세무서 관계자는 “민원인들이 자주 들고 오던 음료수 박스를 보기 힘들다”며 “사무실 냉장고가 텅 비었다”고 전했다.
혼란·피해 등 부작용도 나타나
아직 법 시행 초기인 데다 법원에 판례가 쌓이지 않아 사회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가이드라인’이 없다. 이 때문에 혼란은 피할 수 없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27일까지 112로 걸려온 김영란법 위반 신고는 289건이었다. 경찰에 서면으로 신고된 것은 12건이다. 경찰은 서면신고의 경우 원칙적으로 일단 조사한다.
하루 평균 9.6건인 112 신고는 대부분 단순 상담이었다. 의사, 간호사에게 감사의 음료수나 간단한 선물을 줘도 되는지,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 과자나 음료수를 갖다 줘도 되는지를 묻는 식이다. 국민 상당수가 여전히 ‘모호한 법’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공직자들의 외부 접촉이 사실상 차단되면서 ‘고립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부처의 경우 세종시로 이전하면서 현장 목소리를 듣기 힘든 상황인데, 김영란법 시행으로 기업인이나 민원인을 만나기 더 힘들어졌다. 이 때문에 현실 감각이 떨어지거나 현장과 동떨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학교수도 외부 강의료 제한을 받으면서 외부강의에 소극적이다. 활발한 외부 강연을 통해 지식을 전파하고 대중화하는 데 주춤거리고 있다.
화훼업계와 외식업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화훼농가들은 울상이다. 각종 화환과 축하 난 주문이 급감해서다. 충남에서 생산량의 40%를 차지하는 태안지역 화훼농가들은 “경매시장에 내놓은 호접란이 유찰돼 되돌아올 정도다. 가격이 법 시행 이후 절반으로 떨어졌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외식업체 매출도 추락했다. 신한카드가 김영란법 시행 전 평일 10일(9월 5∼9일, 19∼23일)과 시행 후 평일 14일(10월 4∼7일, 10∼14일, 17∼21일)을 비교한 결과, 과천시와 세종시의 법인카드 이용 건수가 각각 7.7%와 0.7%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중식(-10.4%), 양식(-7.1%), 한식(-3.6%) 등 비싼 메뉴가 많은 요식업종의 법인카드 이용금액 감소가 두드러졌다.
유흥주점 법인카드 이용금액도 5.7% 줄었다. 2차 문화가 줄어들어 귀가 시간은 빨라졌다. 택시의 경우 오후 7시대 매출이 1.2% 늘어난 반면 오후 8시대(-0.6%)와 오후 9시대(-0.5%) 매출은 줄었다. 신한카드 관계자는 “저녁 시간에 집을 중심으로 한 가족문화와 쇼핑문화 관련 소비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글=윤성민 백상진 임주언 기자 woody@kmib.co.kr, 그래픽=안지나 기자
공무원들 ‘저녁있는 삶’ 얻었지만 현장 혼란은 여전
입력 2016-10-28 0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