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약속, 책임 있는 변화’.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 새누리당이 발간한 대선 정책공약집의 이름이다. 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 책자다.
이 책자를 4년 만에 다시 펼쳤다. 주요 공약들과 현재의 정치 상황이 오버랩된다.
공약 1. 대통령 친인척 및 측근들의 비리와 부패 근절
대통령의 연설문과 인사·외교 관련 보고서가 최순실씨의 컴퓨터로 보내졌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 선거 등 합법적 절차로 선출된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다. 장관도 자리에 맞는 권한을 갖기 위해 인사청문회라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국민들은 베일에 싸여 있는 최씨에게 권력을 준 적이 없다. 호스트바를 다녔다는 의혹이 제기될 정도로 사생활이나 자질도 의심을 받았다. 하지만 최씨는 권력의 칼자루를 즐겼다. 박 대통령의 사적인 감정으로 민주주의 기본 원칙이 훼손된 것이다.
국민들은 박 대통령의 독선적인 정치스타일에 염증을 느꼈다. 하지만 독한 성격 탓에 주변 관리도 모질게 할 것이라는 일말의 믿음 때문에 참고 견뎠다. 그 모든 게 산산조각났다.
새누리당의 한 친박 의원은 “다른 전임 대통령들처럼 박 대통령의 각종 보고서가 차라리 친동생인 박지만 EG 회장에게 전달됐더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울분을 토로했다.
공약 2. 효율적이고 민주적인 국정 운영
‘최태민·최순실’ 부녀 이름은 어두운 꼬리표처럼 박 대통령 뒤를 따라다녔다. ‘최순실 게이트’는 최씨의 부친 최태민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씨는 삶 전체가 의문 속에 있고,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인물이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에게 접근해 ‘구국여성봉사단’을 설립한 뒤 횡령, 사기, 성추문 등 각종 비리 의혹에 휩싸였다. 부녀가 대를 이어 40년 동안 국정을 농단했다는 비판은 그래서 나온다.
특히 최씨 부녀 이름이 나올 때마다 친박 의원들은 “결혼 안 한 여성이 정치를 하다보니 별소리를 다 듣는다”며 오히려 박 대통령을 감쌌다. 그렇게 측근들도 모르게 최순실씨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효율성과 민주적 운영은 투명성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숨어 있는 인물이 행세를 하다보니 온갖 비효율적이고 비민주적인 일들이 속출했다. 대표적인 게 인사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인물이 갑자기 정부 요직이나 노른자위 자리를 차지했을 때 묘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공약 3. 북핵 문제, 협상의 다각화로 해결
경제는 엉망이고, 북핵은 남한의 어린이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이 됐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을 둘러싼 추문으로 온 나라가 말이 아니다.
박근혜정부는 ‘대결 정부’로 역사에 기록될지 모른다. 소통을 원하는 국민들과 대결했고, 북한과도 대결했고, 야당과도 대결했고, 여당 내 비주류와도 대결만 했다.
분노를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박 대통령이 소통해야 할 대상과는 대결을 했고, 멀리해야 할 대상과는 소통을 했다.
철 지난 공약집에는 다른 공약들도 보인다. ‘국민행복 기술로 새로운 일자리 창출’, ‘소상공인 영업 활성화 지원’, ‘집 걱정 없는 세상’, ‘학벌이 아닌 능력중심 사회 구현’.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당시 권력을 잡았던 친이(친이명박)계가 친박계에 대해 공천학살을 했을 때 박 대통령이 했던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 지금 온 국민이 박 대통령에게 되돌려주고 싶은 말이 아닐까.
하윤해 정치부 차장 justice@kmib.co.kr
[세상만사-하윤해]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
입력 2016-10-27 1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