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여성운동 선두에 섰던 아흔 무렵, 더 감사하고 더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

입력 2016-10-27 20:25
김현자 전 국회의원이 결혼 50주년을 기념하는 2003년 금혼식에서 남편 오기형 교수(왼쪽)의 팔짱을 끼고 입장하고 있다.

30년 만에 실시된 1991년 첫 지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여성계는 기대에 부풀었다. 여성의 정계 진출이 활발해질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여성의 당선 비율은 0.9%에 그쳤다. 선거 이튿날 김정례 전 보건사회부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도 미국처럼 정치연맹 같은 단체를 만들어 여성들의 의회 진출을 도웁시다.”

그렇게 한국여성정치연맹이 탄생했다. 97년엔 내가 총재를 맡기도 했다. 아직도 국회의 여성의원 비율은 20%에 미치지 못한다. 여성들의 의회 진출을 활발하게 하려면 선거구를 대선거구로 만들고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해야 한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이 제도를 통해 여성의 의회 진출 비율을 50% 전후로 끌어올렸다.

돌아보면 2003년은 참 특별한 해였다. 사회활동 면에서 ‘나의 친정’과 같은 YWCA에서 주는 대상을 받았고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주는 제3회 비추미 여성대상도 받았다. 여성지위 향상과 공익 증진에 기여했다는 공로였다. 결혼 50주년을 맞아 금혼식도 했다. 행사 당일 남편은 자녀들이 맞춰준 새 양복에 보타이를 매고 싱글벙글하던 게 눈에 선하다. 행사 마지막 순서엔 3대가 모여 합창을 했다.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손님 중 한 분은 내게 “회혼식 때도 불러주세요”라고 했다.

하지만 회혼식은 할 수 없었다. 남편이 2008년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반세기 이상을 함께 살았어도 먼저 떠나간 그가 왜 이렇게 그리울까. 우리 부부는 매일 새벽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했고 대화를 나눴다. 남편은 나의 사회생활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줬다. 자녀들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더 크다. 내가 잘 돌봐주지 못했는데도 모두 하나님 안에서 잘 자라줬다.

어릴 때부터 로봇에 관심 많던 장남 준호는 미국 버클리대 유학 후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있다. 차남 강호는 미국 드렉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구조공학 전문가로 일한다. 딸 혜련은 전업주부로 지내다 지난해부터 각당복지재단 이사로 일하고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자녀들은 주일예배를 드린 뒤 우리 집에 모여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다.

이젠 모이기 어렵다. 내가 기력이 너무 떨어졌다. 집 밖으로도 거의 나가지 않는다. 이태 전이다. 1년에 서너 차례 여고 동창회 모임이 있었다. 20명 정도가 모이는 자리였다. 나보다 2년 선배도 한 분 계셨다. 오랜만에 만날 반가운 얼굴을 떠올리며 약간 들뜬 기분으로 가는 모임이었다. 그날도 그렇게 택시에 올랐다. 그런데 그날은 늘 다니던 식당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스무 번도 넘게 드나들었던 식당인데….’ 절망감을 안고 귀가했다. 늙는다는 건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노년이란 하나님께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신 33:27)

곧 울긋불긋한 잎사귀들이 우수수 떨어질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우리 모두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자기 전에 항상 이렇게 기도한다. ‘주여, 오늘 내게 이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이 땅에 있는 동안 모든 것을 더 깊이 사랑하게 하소서.’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