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냉전시대 선전선동에 동원된 문화

입력 2016-10-27 20:17

1950년 독일에서 출간된 ‘실패한 신’은 유럽 공산주의 지식인들의 집단적 참회서이자 고백서, 그리고 전향서였다. 이 책은 당대 유명 지식인 6명의 공동 저작이었지만 미국 CIA가 주도한 여론전의 산물이기도 했다. CIA는 이 책을 기획했고, 출간 후 유럽 전역에 배포했다.

냉전시기 소련은 문화를 정치적 선전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데 전문가였다. 뒤늦었지만 미국의 ‘문화적 냉전’도 만만치 않았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60년대 후반까지 20여년간 CIA가 서유럽에서 은밀하게 진행한 문화분야의 선전선동 활동을 방대한 자료를 통해 보고한다.

책에 따르면 전후 유럽의 작가, 시인, 예술가, 역사가, 과학자, 평론가 중 CIA의 이 은밀한 사업과 연관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비밀 작전의 중심에는 CIA 요원 마이클 조센슨이 주도했던 세계문화자유회의(CCF)가 있었다. 이 단체는 유력 잡지 20종 이상을 발행했으며, 전시회, 연주회, 책 출판, 국제 콘퍼런스 등을 조직했다. 이 단체의 목표는 서유럽 지식인들을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의 매혹에서 벗어나게 하고, 미국의 가치를 수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MoMA(뉴욕현대미술관) 중심의 추상표현주의가 유럽에서 냉전의 무기로 사용됐다는 논란은 꽤나 유명한 것이다. 미국은 영화는 물론 기독교마저도 문화전쟁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책은 앙드레 지드, 한나 아렌트, 조지 오웰, 버트란드 러셀, 아서 밀러, 라인홀트 니부어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이 과정에서 어떤 삶을 선택했는지 잘 보여 준다.

이 책은 CIA의 비열한 술수와 함께 지식인들의 허약함과 위선, 부도덕함 등을 가차 없이 폭로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지식과 지식인들이 이 사회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메커니즘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전업의 지식인들이 지배계급이 만들어 주고 관리하는 지식 생산과 유통의 장치 안에 포획되어 있다는 것, 지식인의 명성이 반드시 그들의 사상적 훌륭함에 의존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김남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