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선의원이던 나는 1981년 한 여성잡지에 ‘동성동본 불혼제도’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가족법 개정의 필요성을 담은 글을 기고했다. 얼마 뒤 당 대표가 나를 호출했다. “요새 가족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여기저기 강연을 하고 다닌다지요?” 나는 강연이 아니라 글을 썼다고 대답했다. “당내에서는 사견을 함부로 말해선 안 됩니다. 당은 가족법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것이니 김 의원도 그러지 마세요.”
나는 대신 우리나라의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 가입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우회적인 노력이었다. 협약에는 여성을 차별하는 가족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주는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대하 1:10).” 노신영 외무장관에게 가입을 촉구했고, YWCA 등의 여성단체를 통해 정부에 진정서를 내게 했다. 84년 한국은 91번째 가입국이 됐다.
12대 국회 초기 한국여성개발원법을 발의했다. 일부 남성의원은 “그러면 ‘남성개발원’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나는 “거의 모든 국가기관이 남성 위주의 남성기관 아닌가요”라고 응수했다. 여성의원들은 2년여 만에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여성의원들은 정부에 여성 장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나는 대정부질의를 통해 제2정무장관을 여성으로 임명할 것을 정부에 건의했고, 이는 88년 받아들여졌다. 큰 보람이다.
이태영(1914∼1998) 박사는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가정법률상담소 설립자다. 이 박사를 필두로 모인 60여 여성단체는 1980년대 가족법 개정을 적극 추진했다. 여성계는 동성동본 불혼제는 혼인의 자유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남계 혈족만을 기준으로 하는 성차별이라고 주장했다. 또 남성만을 호주로 규정하는 호주제는 여성을 남성 종속적 존재로 전락시킨다고 역설했다.
11대 국회에는 나를 포함해 여성의원 8명이 있었다. 당은 이 논의 자체를 기피했다. 여성의원들은 당 간부를 개인적으로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반응은 가지가지였다. “개인적으론 찬성하지만 유림과 문중들이 반대해요.” “가족법 개정에 찬성하면 지역구에서 표가 다 떨어져요.” 여성의원들은 매일 내 방에 모여 고민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여성계에서 질타의 목소리가 연일 터져 나왔다. 이태영 박사는 노기 띤 목소리로 전화를 하거나 찾아왔다. “왜 가족법 개정안에 서명 안하는 거유. 당신이 제일 앞장서야지. 이건 여성을 배신하는 거요. 안 되더라도 내보기라도 하라우.” 나는 이 박사에게 12대 국회가 맨 먼저 이 문제를 다룰 것이라고 했지만 “12대 국회의원 공천을 못 받게 될까봐 안 하는구먼”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존경하던 분의 말에 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12대 국회에서 여성의원들은 가족법 개정안에 대해 61명의 찬성 서명을 받았다. 그런데 이번엔 전국 유림들이 들고 일어났다. 3000여명이 국회의사당 앞으로 몰려왔다. 여성의원들은 욕설 담긴 편지와 전화에 시달렸다. 12대에서도 이 법안은 상정되지 못했다. 가족법은 89년에 일부 손질됐고 동성동본 금혼제와 호주제는 2005년에야 폐지됐다. 비록 우리가 결실을 보진 못했지만 초기 여성의원들의 노력이 폐지를 위한 물꼬를 텄다고 믿는다.
정리=강주화 기자
[역경의 열매] 김현자 <12> 8명뿐인 여성의원, 가족법 개정 위해 매일 머리 맞대
입력 2016-10-26 2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