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현자 <11> “에스더처럼 나라 구하자” 정치참여 제안 수락

입력 2016-10-25 21:16
1981년 여성계 대표로 11대 국회에 진출한 김현자 전 국회의원(가운데)이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을 하고 있다.

YWCA 실행위원회 회의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1978년쯤이다. 영국 런던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를 탔다. “잠시 후 이 비행기는 모스크바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러시아(당시 소련)를 경유하는 비행기였던 것이다.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반공(反共)이 국시였다. 그땐 공산국가를 여행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관계자가 기내에서 승객의 여권을 모두 회수했다.

‘러시아 당국이 나를 적성국 국민으로 분류하고 억류하면 어떡하지?’ 공항 대기장에 들어갔다. 다리가 오들오들 떨렸다. 다행히 40여분 만에 탑승안내 방송이 나왔고, 나는 별일 없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박순양 총무에게 소련을 경유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YWCA 실행위원으로 일하는 8년 동안 나는 전 세계를 다니며 여성 문제를 포함한 전 세계적 이슈에 대해 공부했다.

국내 정세는 위태로웠다. 박정희 대통령이 79년 총탄에 숨지고 이듬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광주에서는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다. 군부는 시민들을 잔혹하게 진압했고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나는 YWCA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같은 해 11월 중순 김행자 이대 교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당시 신군부의 입법위원이었다. “점심을 함께 합시다. 다른 입법위원도 동석한다”고 했다. 대학 교수들이 주로 입법에 참여하고 있는 줄 알았다. 식당에는 남성 2명이 있었다. “어느 대학에서 오셨어요?”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김 교수가 당황하며 “이분들은 군인 출신”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쿠데타를 주도한 신군부의 요인 권정달과 이종찬씨였다.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새 정당의 발기인으로 참여해주십시오.”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광주 시민들을 무참히 짓밟고 권력을 장악한 군인들과 함께 한다고? 말도 안 된다.’ 참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김 선생이 여성계를 대표할 적임자로 선정됐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수락하기 곤란합니다. 정치를 해본 적도 없고, 제 성격에 맞지도 않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YWCA가 여성의 정치참여를 얼마나 외쳐왔던가.’ 바로 이틀 전에도 한국여성단체협회가 ‘정책 결의 기구에 여성을 참여시켜 달라’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하지 않았던가. 며칠 뒤 김정례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장이 우리 집을 직접 찾아왔다. 나와 같은 신앙인으로 평소 매우 절친하던 이였다.

“김 선생, 우리 새 정당에 가서 함께 일해 봅시다. 구약의 에스더처럼 나라를 구합시다.” 내 손을 꼭 쥔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제안을 수락했다. 하나님은 민족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고 한 에스더의 편이 돼 준 것처럼, 우리 편이 돼 주실 걸 믿기로 했다.

하지만 그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가 정치를 할 수 있을까. 친구들이 실망하진 않을까?’ 나는 모선을 떠나 망망대해로 나간 조각배가 된 기분이었다. 81년 민정당 전국구 후보 21번을 받았고, 김 회장과 함께 11대 국회의원이 됐다. 나는 가족법 개정 등 여성계에서 숙원하는 사안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