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주여, 주여”

입력 2016-10-25 20:56

오늘 본문에는 ‘주여’ 혹은 ‘주’라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신앙고백이 담긴 표현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 예수님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는 이런 말씀이 등장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신약성서에는 두 개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와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입니다. 확인할 수 있다시피 여기에서도 모두 ‘주님’ ‘주’라고 고백합니다. 즉 ‘예수께서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고백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23절에 적혀 있습니다. ‘불법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말하면서도 삶에서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전하면서 동시에 ‘믿음의 질(質)’을 강조합니다. 참된 믿음은 행동을 통해 나타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과거 경제적으로 낙후됐던 한국사회에서는 질보다는 양이 중시됐습니다. 품질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양이 많으면 어떤 상품이든 환영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질이 중요합니다.

한국교회는 경제 상황이 열악했던 옛날에도 믿음의 질은 뛰어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존경했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작금의 한국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해졌는데도 믿음의 질은 떨어지고 한국교회의 호감도도 추락했습니다.

그렇기에 한국교회는 오늘 소개한 본문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주여 주여”라고 외치더라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주여”라는 표현에는 큰 종교적 열정이 담겨 있습니다.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모습도 연상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문해야 합니다. 열정만 있는 것은 아닌지, 열정이라도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열정만 있으면 ‘믿음의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열정만으로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졌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신앙생활에 열심이라는 이유로 참된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열정만 갖춘 믿음은 ‘유사 믿음’일 뿐 참된 믿음이 아닐 겁니다.

물론 참된 믿음은 열정을 동반합니다. 다시 한 번 본문 말씀을 묵상해봅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의 믿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혹시 ‘유사 믿음’은 아닌지 스스로 자문하는 시간을 가지길 바랍니다.

정기승 목사 (인천 도장교회)

◇약력=△감리교신학대학교, 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