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남의 잘못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남을 용서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전에, 내가 남에게 용서받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용서를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에 사는 늙은 예언자는 남유다에서 온 예언자, 곧 ‘하나님의 사람’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러자 늙은 예언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식사 대접을 명령하셨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참말로 믿은 하나님의 사람은 그의 집으로 와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대가로 남유다로 돌아가던 중 사자에게 물려 죽게 됩니다. 늙은 예언자는 그 주검을 집으로 옮겨와서 그 주검 앞에서 슬퍼하며 웁니다. 그런 다음 자기 무덤에 안장합니다. 늙은 예언자는 그 주검을 안장한 뒤에도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며 통곡했습니다. 늙은 예언자는 자신이 죽은 뒤 하나님의 사람이 묻힌 곳에 같이 묻히길 소원합니다.
늙은 예언자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심어린 사과와 진정한 ‘용서 구함’이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오호라 내 형제여”라는 그의 탄식 다음에 어떤 말이 나왔겠습니까. “내 거짓말 때문에 당신이 죽었구려. 정작 죽어야 할 사람은 나인데 왜 당신이 죽는단 말이요. 너무 미안하오. 이 못난 늙은이를 부디 용서하시오.” 이런 용서 구함이 이어지지 않았겠습니까.
늙은 예언자는 장례를 마친 뒤 자기 아들들에게 당부합니다.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자기 뼈를 하나님의 사람의 뼈가 묻힌 곳에 같이 묻어달라는 것은 죽어서까지도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기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생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온 늙은 예언자가 이렇게 용서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운운하며 거짓말을 했다는 것에 대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은 예언자로서의 그의 권위를 산산조각 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일에 개의치 않으면서 낮은 자세로 사과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참 보기 드문 광경입니다. 가해자가 잘못을 하고도 피해자에게 뻔뻔하게 대드는 것이 요즘 우리 현실입니다. 가습기살균제 사고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 봐도 그렇습니다. 가습기살균제 사고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서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에게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해자들의 진심어린 사과와 용서 구함입니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 하나 진심으로 사과를 하거나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역사적인 문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개인적 사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관용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이 외려 어리석고 순진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양심이 무뎌지고 뻔뻔한 사람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잘못된 흐름입니다. 남에게 잘못을 했으면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안선희 이화여대 교목
◇약력=△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졸업, 독일 프랑크푸르트대 신학박사 △현 이화여대 기독학부 교수
정리=강주화 기자
[오늘의 설교] 용서를 구하는 사람
입력 2016-10-24 2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