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현자 <10> 세계YWCA 실행위원 당선… ‘자고 나니 유명’

입력 2016-10-24 21:07
YWCA 실행위원으로서 가족법 개정을 촉구하는 강연회에 참석한 김현자 전 국회의원(왼쪽에서 네 번째)이 1973년 사회자의 발언을 듣고 있다.

이대 YWCA 학생들은 전담 간사의 부임을 기뻐했고 수시로 내 사무실을 방문했다. 당시 YWCA 회장은 수학을 전공하는 장상(77·전 이대 총장)이었다. 그의 너털웃음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명랑하게 만들었다. 장상은 깊은 신앙과 폭넓은 사고력을 갖추고 있었다. 장상은 수업만 끝나면 내방에 왔다. “네 전공이 수학이냐, YWCA냐?” 수학과 교수들이 장상에게 그렇게 물을 정도였다. 졸업을 앞두고 장상이 나를 찾아왔다. “전 수학과를 졸업한 뒤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요.” 나는 적극 찬성했다. 장상은 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나중에 이대 총장이 됐다.

전쟁 후 전쟁고아와 미망인 구호사업에 주력하던 YWCA는 1960년대 이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교양강좌, 사회문제 연구모임을 발전시켜 나갔다. 나는 이 무렵 YWCA 유급 직원에서 자원봉사자가 됐다. “내가 학교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엄마가 집에 있었으면 좋겠어.” 친정 어머니가 세 자녀 준호, 강호, 혜련을 돌봐주셨지만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다. 건강도 썩 좋지 않았다.

“더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박에스더 선생은 나의 요청을 받아주었다. 실제 나는 자원봉사자로 YWCA 일을 계속했고, 71년에는 가나에서 열린 세계 YWCA 대회에서 세계 YWCA 실행위원으로 당선됐다. 실행위원은 20명이었다. 귀국해보니 유명인사가 돼 있었다. “청와대 육영수 여사가 축하한다고 전화를 했어. 네가 대단한 사람이 된 거냐?” 어머니의 얘기였다. YWCA에서도 축하 행사를 열었다. 누군가 세계기구의 위원이 된다는 게 큰 뉴스거리였다.

그땐 내국인의 해외 진출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70년대 김포공항은 지금 국내 여객기 청사의 4분의 1 크기도 되지 않았다. 2층 옥상에는 송영을 위한 전망대가 따로 있었다. 가족들은 그 전망대에 서서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손을 흔들며 환송했다.

실행위원이던 내가 회의와 행사 참석차 외국으로 떠나고 돌아올 때면 박 선생이 다른 직원들과 비행장에 나와 꼭 환송해주었다. 박 선생은 가슴에 코사지(꽃송이)를 달아주고 “잘 다녀오라”고 말하며 포옹해주었다. 남편도 그 자리에 늘 있었다. 떠나는 사람은 환송객이 손을 흔드는 가운데 천천히 걸어 비행기로 걸어갔고, 탑승 직전 되돌아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얼마나 훈훈한 광경인가. 거대한 지금의 인천공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세계 YWCA는 군축, 평화, 교육, 보건, 난민, 노동, 인권 등 유엔이 다루는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뤘다. 나는 실행위원 회의에 활발하게 참여했지만 한 가지 주제는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어려웠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였다. “사업주들이 외국인 노동자의 불법체류 등 신분적 약점을 악용해 인권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상황에 대해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독일에서 일하는 한국인 간호사와 광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유린 문제도 심각하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라고 하셨다. 주를 대하듯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을 대한다면 나중에 주님이 크게 칭찬하실 텐데….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