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년 vs 68년, 한 저주만 풀린다

입력 2016-10-24 00:02
시카고 컵스 선수들이 23일(한국시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리글리 필드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 6차전에서 LA 다저스를 꺾고 월드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은 뒤 고글을 쓰고 샴페인 파티를 벌이고 있다. AP뉴시스
테오 엡스타인 사장(오른쪽)이 챔피언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는 톰 리켓츠 구단주 옆에서 박수를 치고 있는 모습. AP뉴시스
2004년 10월 27일 미국 세인트루이스 부시스타디움. 붉은 글씨의 ‘RED SOX(레드삭스)’가 선명하게 새겨진 회색 야구복을 입은 덩치 큰 사내들이 상기된 얼굴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우승. 그러나 이 우승은 여느 우승과는 너무도 달랐다. 무려 86년만에 찾아온 기적이었다. 세기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그렇게 밤비노의 저주를 깼다. 이 사건의 한 가운데 두 사람이 있었다. 당시 29살의 청년이던 테오 엡스타인 단장과 40대의 테리 프랑코나 감독이었다. 그들은 이후 ‘저주 사냥꾼’으로 이름을 떨쳤다. 나이 차이는 있었지만, 엡스타인과 프랑코나는 절친이었다. 엡스타인이 선수를 스카웃하면, 프랑코나는 그 선수의 최고 가치를 야구장에서 다 증명해냈다.

그리고 12년의 시간이 흘렀고, 형제와도 다름 없던 두 사람은 이제 적으로 만나야 하게 됐다. 각각 또 다른 저주를 풀기 위해 말이다. 43살이 된 엡스타인은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을 차지한 시카고 컵스의 단장 겸 사장이다. 57살의 프랑코나는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을 장악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감독이다. 오는 26일 두 팀은 2016 월드시리즈에서 맞붙는다. 엡스타인과 프랑코나는 서로의 가슴과 머리를 겨냥할 것이다. 상대방이 어떤 작전을, 어떤 의중을, 어떤 심리를 갖는지 너무나도 잘 아는 두 친구는 이제 서로를 향해 정면 돌진해야 한다.

유태계인 엡스타인은 명문 예일대를 거쳐 로스쿨을 졸업한 최고 엘리트 변호사 코스를 밟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어릴 적부터 자신이 가장 사랑한 구단 레드삭스의 단장을 맡고 싶어했다. 밤비노의 저주를 자기 손으로 부셔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변호사 경력을 다 버리고 엡스타인은 2002년 메이저리그 최연소 단장에 올랐다. 취임하자마자 강타자 데이비드 오티스와 케빈 밀러, 에이스 커트 실링을 잇달아 영입했다. 프로야구 선수 출신이 아닌데도 그에겐 어떤 선수가 성공할 것인지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하지만 엡스타인은 선수 영입까지만이 자기의 역할이라고 여겼다. 나머지는 감독인 프랑코나에게 다 맡겨 확실하게 힘을 실어줬다. 프랑코나는 한마디로 ‘하이브리드(hybrid·잡종)’ 감독이다. 선수들을 덕으로 감싸는 ‘덕장(德將),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용장(勇將)’, 탁월한 지략을 갖춘 ‘지장(智將)’을 다 겸비한 사람이었다. 최고 선발이던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불펜투수로 기용해 2004년 월드시리즈 우승컵을 얻을 정도였다.

이제 엡스타인이 깨야 할 저주는 108년 동안 컵스를 짓눌렀던 ‘염소의 저주’다. 프랑코나의 소임은 68년 동안 클리블랜드에 암운을 드리웠던 ‘와후 추장의 저주’를 푸는 것이다.

컵스는 23일 시카고 리글리필드에서 열린 포스트시즌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7전4선승제) LA 다저스와의 6차전에서 5대 0으로 완승을 거뒀다. 컵스는 시리즈 전적 4승2패로 1945년 이후 무려 71년 만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1945년 이 구장에서 열린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염소 ‘머피’를 데리고 야구장에 왔다가 쫓겨난 컵스 팬 빌리 시아니스가 “리글리필드에서 다시는 월드시리즈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저주한 뒤 컵스는 이 징크스에 시달려왔다.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이미 프랑코나 감독이 지휘하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월드시리즈에 선착했다. 클리블랜드는 아메리칸리그에서 가장 오랫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하는 팀이다. 클리블랜드는 1951년 마스코트인 와후 추장 캐릭터를 익살스럽게 바꿨다. 이후 하위권을 전전하자 “와후 추장을 희화화했기 때문”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올 시즌도 클리블랜드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선발에 구멍이 생겼다. 하지만 프랑코나 감독의 용병술로 클리블랜드는 포스트시즌에서 7승1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이제 두 저주 중 한 개는 깨지게 됐다. 엡스타인과 프랑코나, 이제 얄궂은 운명을 짊어진 채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 한 명은 환희의 순간을, 다른 한 명은 저주의 굴레에서 피눈물을 흘려야 한다.

◆메이저리그 4대 저주




◇염소의 저주: 시카고 컵스가 1945년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홈구장인 리글리필드에서 경기를 치를 때 염소와 동반 입장하려다 거부당한 관중의 악담에서 비롯됐다. 마지막 우승은 1908년. 메이저리그 최장 무관(無冠)이다.


◇와후 추장의 저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1951년 마스코트 와후 추장의 디자인을 우스꽝스럽게 바꾸는 바람에 인디언의 원한을 샀다는 설이다. 1948년을 끝으로 지난해까지 67년간 우승하지 못했다.


◇밤비노의 저주: 1920년 라이벌 뉴욕 양키스로 베이브 루스를 트레이드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오판을 지칭한다. 그 이후 밤비노의 저주가 시작됐다. 2004년 이전까지 86년간 우승하지 못했다. 밤비노는 루스의 별명.

◇검은 양말의 저주: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고의적으로 패배한 승부조작사건이후 몰락했다. 1917년 이후 88년 만인 2005년 우승으로 저주를 깼다.









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