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유형진] 바늘 하나로 버텨야만 하는 일

입력 2016-10-23 17:36

요즘같이 세상 시끄럽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숨 먼저 쉬면서 말을 꺼낼 때엔 어지간하면 사람들 많이 모여 있는 곳에 안 가고 싶고, 더러운 세상 소식 안 듣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몸이 세상 사람들 속에 들어가 있지 않아도 스마트폰으로 들여다보는 SNS 세상은 내 발로 돌아다니며 보고 듣는 소식보다 더 광범위하고 자세하다.

그러니 진정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고,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고, 그리하여 흰 눈이 폴폴 내리는 날, 흰 당나귀를 타고 나타샤와 함께 마가리에 가서 살’ 작정이면, 가장 먼저 스마트폰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요 며칠 내 신간에도 복잡한 일들이 많았는데, 그 일들은 다 처리 못하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정보 수집과 소통을 빙자하며 SNS에 의존하다 보니 내 영혼이 너덜너덜해지는 듯했다. 그래서 SNS 앱을 지우고 시작한 것이 바늘을 잡는 일이었다. 그래서 몇 달 전에 사놓고 뜯지 않은 ‘빨강머리 앤 퀼트가방 패키지’를 뜯었다. 고아소녀 앤이 처음으로 친구 다이애나를 만나던 날, 다이애나의 집 정원에서 우정의 맹세를 하던 장면이 그려 있는 원단이었다. 이것은 나에겐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마가리 효과’의 주술 같은 짓인데, 앤의 절대낭만과 순수긍정이 지금 너무 절실하기 때문이다.

지금 SNS에서 ‘#문단 내 성폭력’ 이슈로 그동안 꽉꽉 막혀 있던 피스톤에서 분노의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 분출하는 분노가 향하는 곳이 어딘가 바라보려니 너무 고통스럽다. 나 또한 알고 있던 이름들, 한 번은 어딘가에서 마주쳤을 얼굴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 그 분노의 물결이 곧 나이기도 하고, 그 분노가 향해 있는 곳 또한 나 자신이기도 한 상황인 것이다. 나는 직접적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지만, 그래서 간접적 피해자고 가해자다. 이것이 내 몫의 고통이라면 피하지 않고 견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형진(시인), 그래픽=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