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뮤지컬·오페라 연출 경계가 사라진다

입력 2016-10-23 18:47
연출가 고선웅(오른쪽)과 ‘맥베드’ 부인 역의 소프라노 정주희가 2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서울시오페라단의 ‘맥베드’ 연습 중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작품은 최근 연극, 뮤지컬, 창극을 오가며 뛰어난 연출력을 보여준 고선웅의 첫 오페라 도전이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지난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연습동. 서울시오페라단이 11월 24∼27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릴 베르디의 ‘맥베드’ 연습이 한창이었다. 맥베드 부인이 남편의 편지를 읽은 뒤 왕을 암살할 기회라고 외치는 1막2장의 앞 부분이었다.

연출가 고선웅(48)은 맥베드 부인 역의 소프라노 정주희에게 “연기하면서 갑자기 멈추지 말고 물 흐르듯이 움직임을 이어가라”고 여러 차례 지시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지휘자 구자범이 “음악적으로 강조해야 하는 부분에서 성악가가 움직이며 노래하기가 쉽지 않다”고 조언했다.

본격적으로 연습에 들어간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탓에 한 장면을 연습하는 동안 연출가, 성악가, 지휘자 사이에 여러 차례 토론이 이뤄졌다. 연극 연출가 출신인 고선웅은 캐릭터의 심리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자연스런 연기를 주문하면서도 음악적인 부분에서 충돌할 땐 타협점을 찾았다.

고선웅은 “오페라를 잘 모르면서도 성악가들의 아리아에 감동받곤 해서 늘 오페라 연출을 해보고 싶었다”면서 “‘맥베드’는 과거에 연극(‘칼로 막베스’)으로 연출했던 경험도 있어서 선뜻 맡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이탈리아어도 모르고 악보도 겨우 읽는 수준인 만큼 음악적인 부분은 조언을 많이 받고 있다. 연출가로서 내 역할은 극을 긴장감있게 만들기 위해 배우들의 연기와 동선에 집중하는 한편 설득력 있는 미장센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연극, 뮤지컬, 창극을 오가며 맹활약 중인 고선웅이 이번엔 오페라 연출에 나섰다. 해외에선 연출가가 장르 구분 없이 연출하는 경우가 많지만 국내에선 1970년대 이후엔 대체로 음대 출신 오페라 전문 연출가들이 활동해 왔다. 다만 2000년대 중반부터 연극 연출가로 활동하는 이윤택, 양정웅, 서재형, 김태형이 잇따라 오페라 연출에 나서며 장르간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특히 양정웅은 ‘천생연분’ ‘보체크’ ‘연서’ ‘카르멘’ 등 여러 편을 연출했다.

국립오페라단 단장 시절부터 꾸준히 연극 연출가를 기용해 온 정은숙 성남아트센터 사장은 “해외에선 연극 연출가만이 아니라 영화감독도 오페라를 많이 연출한다. 텍스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오페라 연출도 충분히 할 수 있다”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박찬욱 감독에게 오페라 연출을 의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동안 국내에서 연극 연출가가 선보인 오페라에 대한 평가가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음악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에 성악가의 노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거나 작품의 해석이 과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장르간 벽이 낮아지고 다양한 배경의 연출가가 오페라에 도전하는 것이 좋다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지난 9월 예술의전당 ‘마술피리’를 연출한 국내 대표적인 오페라 전문 연출가 이경재는 “한국에선 그동안 장르간 교류가 적고 각각의 시장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장르마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만큼 점점 다른 장르의 연출가에게도 문을 열 수 밖에 없다. 서로의 특성을 이해하면 새로운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고 지적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