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오의 팔복수훈] 사회적 죽임과 긍휼

입력 2016-10-21 21:28
강병오 교수
우리 사회는 최근 일련의 사회적 죽임을 목도했다. 가정, 학교, 불특정 대상, 국가 폭력으로 편만해진 죽임이다. 개인의 죽음도 슬프지만, 사회적 죽임은 더욱 슬프고 고통스럽다. ‘사회적 죽임’ 신드롬은 한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 전반에 지속적으로 스며들어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공포와 불안을 가중시킨다. 사회적 죽임의 현장에서는 사랑, 배려, 용서, 긍휼 등 따뜻한 사회적 가치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난 5월 17일 20대 여성이 서울 강남역 인근의 건물 화장실에서 흉기에 찔려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해 10월 14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살인혐의로 기소된 30대 김모씨에게 징역 3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가해자의 범행을 사회공동체 전체에 대한 범행으로 규정해 중형을 내렸다. 이 경우 가해자의 살인은 단순히 개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묻지마’ 살해인 사회적 죽임이라고 본 것이다. 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가해자가 단 한 번도 피해자의 명복을 빌었다거나 유족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해자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의조차도 거부했다. 생명 경시 현상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난 긍휼 없는 자의 모습이다.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다(잠 12;10).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 집회 때, 경찰의 폭력적 진압으로 물대포에 맞아 중태에 빠졌던 백남기(사진) 농민이 9월 25일에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 선한 얼굴을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고인의 죽음 역시 국가폭력에 의한 사회적 죽임이라 할 수 있다. 법원과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미 경찰이 저지른 잘못으로 명백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병원 측은 고인의 사인을 놓고 외인사가 아닌 병사란 엉뚱한 결론을 내렸다. 고인의 죽음에 대해서 지금껏 정부 책임자 어느 누구도 경찰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일은 정부가 진상을 솔직하게 밝히기는커녕 사과 한마디조차 없고, 단 한 차례도 조문하지 않는 비정한 모습을 보였다. 국가폭력으로 인한 죽음 앞에서 국가는 긍휼히 여기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긍휼한 자들이 복이 있고, 그들이 긍휼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7). 긍휼은 헬라어로 ‘엘레오스’로, 자비(mercy)와 같은 뜻이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일컫는다. 구약에선 긍휼을 하나님의 속성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항상 긍휼을 베푸셨다(시 136, 103편).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긍휼을 사람들도 실천해야 할 것을 요청하셨다. 긍휼한 자는 단지 감정적, 감상적 태도를 가지는 것이 아닌, 보다 적극적으로 긍휼을 행하는 자이다. 행위가 가능하지 않으면 진심어린 말로, 말로 가능하지 않으면 애통하는 마음으로 보듬어 주는 것이 긍휼이다. 긍휼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 가난에 허덕이고, 실업으로 낙담하고, 곤경과 질병으로 신음하며, 소외된 자들이 그들의 이웃, 사회 지도층과 국가에게 긍휼을 간절히 갈구하고 있다. 긍휼하지 않는 사람이나 사회에겐 긍휼 없는 심판이 기다린다. 하지만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약 2:13).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한 판사가 법정에 나와 피도 눈물도 없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에게 긍휼할 것을 연설했다. 고리대금업자가 빚을 갚지 못한 자에게 계약대로 심장 부근의 살점을 1파운드만큼 베겠다고 한 것에 대한 반론을 폈다.

“긍휼의 성격은 부자연스럽지 않고, 하늘의 단비처럼 떨어지는 것이다. 아래로 떨어진 긍휼은 두 배로 복된 것이다. 베푸는 자에게 복되며, 받는 자에게 복된 것이다. 긍휼은 최고의 권력자에게 가장 강력한 것이고, 번쩍이는 왕관보다 옥좌에 앉은 왕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다. 긍휼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이다. 긍휼로 정의를 누그러뜨릴 때, 현세의 권력은 하나님 권세에 가장 가까워지는 것이다.”

강병오<서울신학대 교수·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