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부희령] 우체국 가는 길

입력 2016-10-20 18:52

어디선가 그 냄새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골목 안쪽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몇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 신생대 이래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는 식물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살펴보았다. 푸른 잎들이 성급하게 떨어뜨린 은행 알들이 으깨진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요란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몸을 돌려 달려갔으나 마을버스는 나를 두고 가버렸다.

우체국에 가는 길이었다. 한눈을 판 것은 나였지만, 눈앞에서 버스가 휑하니 떠나버리니 짜증이 치솟았다. 버스 같은 거 안 타고 걸어갈 테다. 작정을 하고 걷기 시작했다. 산동네에서 걸어 내려와 사차선 도로에 이르렀을 때는 그냥 다른 버스를 타고 갈까, 잠시 망설였다. 겨우 서너 정거장거리가 남았을 뿐이라고 마음을 다잡고 계속 걸었다. 약국과 병원, 은행과 피자가게, 빵집, 분식집, 커피숍과 미장원 앞을 지나갔다. 다시 꽃집과 슈퍼마켓, 옷가게와 떡집, 지하철역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넜고, 레스토랑과 카페, 극장과 편의점을 지나쳤다.

마침내 우체국이 있어야 할 곳에 다다랐다. 그런데 우체국이 그 자리에 없었다. 빈자리에는 흰색 담장이 둘러쳐 있었다. 우체국이라는 게 좀 어정쩡한 곳이다. 보낸 즉시 받아 볼 수 있는 이메일과 부르면 집까지 달려오는 온갖 배송 서비스들이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 갑자기 사라져도 납득할 만한 곳이기도 하다. 여행지에서 부친 엽서와 몇 년 만에 보내는 크리스마스카드와 손으로 쓴 편지가 들어 있는 작은 선물 꾸러미들을 위한 장소 같기도 하고. 목적과 쓸모가 선명한 장소인 은행과 식당, 약국과 병원들에 밀려나도 어쩔 수 없는 것 같고.

흰색 담장에 붙어 있는 이전 안내문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한눈파는 버릇이 있는 내가 쓴 엽서와 편지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것들, 누군가에게 가 닿아야 비로소 목적과 쓸모가 선명해지는 그 글들을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 나는 다시 우체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글=부희령(소설가), 삽화=공희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