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현자 <8> YWCA 간사로 전국 대학생 하령회 준비 보람

입력 2016-10-20 20:53
김현자 전 국회의원과 오기형 전 연세대 교수는 1953년 11월 한경직 목사의 주례로 서울 영락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사진이 여성잡지 ‘여원’에 실렸다.

미국에서 내게 청혼했던 오기형씨는 연세대 교수로 임용됐다. 그는 귀국한 내게 다시 청혼을 했다. 그의 구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장애에 부딪혔다. 박에스더 선생의 만류였다. “결혼하면 YWCA 일을 못하게 돼. 2년 동안 훈련받은 시간이 아깝지 않니? 다시 생각해보렴.” 일과 결혼생활을 양립하기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내게 큰 기대를 걸었던 박 선생으로선 큰 실망이었던 것 같다. 나는 “훈련받은 기간의 최소 두 배 이상을 일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얘기했지만 박 선생은 내 말을 미덥지 않아 했다. 결국 오씨가 박 선생을 만났다. “결혼 후에도 현자씨가 YWCA에서 일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돕겠습니다.” 박 선생은 그제야 우리 결혼을 축복했다.

결혼식을 앞두고 YWCA에서 파티를 열었다. 그땐 축의금이 없었다. 작은 선물을 하나씩 가져왔다. 가장 많은 품목은 유기그릇이었다. 선물 중에는 바가지 한 개, 빨래비누 한 장도 있었다. 우리 결혼의 청첩인은 백낙준 연세대 총장과 박마리아 YWCA연합회 회장이었다. 1953년 11월 한경직 목사의 주례로 서울 영락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 결혼식은 장안의 화제가 됐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남녀의 결혼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결혼식 사진은 잡지 ‘여원’ 창간호에 실렸다. 신혼집은 동숭동 2층 양옥 전세였다. 남편은 이 집에 ‘기독학생협동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대학생들의 모임 장소로 개방했다. 서울대에 다니는 시조카 오인호, 그의 친구 이원홍(전 문공부장관), 선교사 리 쿠퍼와 벤 셀든도 자주 왔다.

이듬해 나는 첫 아들 준호를 낳았다. 남편이 57년 연세대 부산분교 학장으로 임명돼 부산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동숭동에서 지냈다. YWCA 간사로 일하는 동안 매년 전국 대학생 200여명이 참여했던 대학생 하령회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YMCA와 YWCA 공동 하령회였다. 내가 준비한 첫 하령회에 대해 YMCA대표인 남학생은 “‘빠다(버터) 냄새’가 난다. 우리는 ‘된장국’을 원한다”고 했다.

너무 미국적이라는 불만이었다. 다양한 오락 프로그램이 그런 느낌을 준 것 같았다. YWCA 간사 동기 김봉화는 반바지를 입었다가 곤욕을 치렀다. “미국서 온 처녀 선생이 다리를 다 드러내놓고 다닌다”는 것이 큰 흉이 됐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전체적으로 매우 기독교적이었다. 50년대 하령회 주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건설하자’ ‘책임지는 그리스도인’ ‘기독자의 용기’ ‘대학생과 소명’ 등이었다.

“전쟁으로 페허가 된 이 땅에 우리는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 민족에게 전해야 합니다.” 청년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역사적 사명에 불타올랐다.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전 11:9).” 그 청년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고 헌신했다고 믿는다.

당시 참가자 중에는 나중에 시민운동의 개척자로 일한 강문규 전 YMCA 사무총장이 있었다. ‘버터 냄새’가 난다고 했던 김봉호씨는 후일 국회의원으로 해후하기도 했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