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정이현(44·사진) 작가가 아줌마가 됐지. 수화기 너머의 꼬마들의 재잘거림을 흘려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2009년 결혼 이후 첫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문학과지성사)를 출간한 정 작가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며 건 전화였다.
“단편은 예민해져야 쓸 수 있어요. 고슴도치 같이 긴장된 상태요. 애들 키우면서는 그게 불가능했어요.”
1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인근 카페에서 만난 정 작가는 “단편으로 등단해서 그런지 단편을 못 쓰니 큰일이다 싶더라. 한 자리에 고여 있는 기분도 들었다”라며 소설집 출간을 무척 기뻐했다.
정 작가는 딱 서른에 발표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다. 강남에서 성장한 그는 도시를 사는 30대 ‘된장녀’ 심리를 발칙하면서도 감성적인 문체로 그렸다. 이는 “정이현만이 구사할 수 있는 세계”라는 호평을 들었다. 그러고보니, 그 사이 장편 ‘너는 모른다’(2010), ‘사랑의 기초-연인들’(2012), ‘안녕 내모든 것’(2013), 경장편 ‘말하자면 좋은 사람’(2014) 등을 냈으나 소설집은 ‘오늘의 거짓말’(2007) 이후 9년만이다.
연년생 두 딸을 키우는 정 작가는 내년이면 학부모가 된다. 2013년부터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며 한숨을 돌리게 됐다. 가족이 잠든 밤, 뾰족하게 연필 깎듯 감각을 한없이 날카롭게 해서 쓴, 군더더기 없는 7편을 골라 묶었다.
수록된 작품을 표제작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가 제목이 됐다. “소설 속 인물들이 다 상냥한 표정으로 남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안나’에 나오는 주인공 경이 대표적이다. 경은 댄스동호회에서 만난 안나가 춤을 잘 추자 “박수 받는 일이 (젊은) 나이 뿐이니 안됐다”고 폄하한다. 십여 년 후 학부모가 된 경은 아들의 영어유치원 보조교사가 된 안나와 조우한다. 경은 아이가 자폐아 행동을 보이자 불안한 마음에 안나와 친구가 된다. 도움을 받았지만 안나가 위기에 놓이자 모른 척 한다. 경에게 안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쉬운 사람’이었다.
고교생 딸 보미가 미숙아를 낳자 수술 결정을 일부러 미뤄 인큐베이터 아기가 죽어가도록 방치하는 지원, 병원은 가보지 않고 500만원 보내는 것으로 도리를 하는 남친 승현의 엄마 미영(‘아무것도 아닌 것’), 함께 살아온 동거녀 ‘미스 조’를 친척에게 소개한 적이 없는 아버지(‘미스 조와 거북이와 나’), 말 한마디 걸지 않는 전학 간 학교의 아이들(‘영영, 여름’)….
단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격을 비하하거나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서도 이렇듯 무심한 듯 타인에게 모멸감을 준다. ‘세련된 폭력’의 시대다.
어느새 40대 중반 주부가 된 그녀의 문장들은 예전과 같은 뜨거움, 도발은 없다. 대신 ‘세상에 파국은 없다’는 걸 알게 된 나이가 주는 ‘서늘한 무심함’이 종이에 베인 듯한 아픔을 주는 소설집이다.
글=손영옥 선임기자, 사진=김지훈 기자
yosohn@kmib.co.kr
[책과 길-상냥한 폭력의 시대] 악의도 없이 잔인한…
입력 2016-10-20 1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