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위선자의 시대

입력 2016-10-19 21:17

헤롯의 생일, 그날 침례 요한이 죽었습니다. 헤롯은 요한을 두려워했고 민란이 일어날까 근심했으나, 염려한 바와 달리 요한의 죽음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비겁한 종교인들이 침묵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이른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으나 위선자였습니다. 그들은 종종 그들의 조상의 때를 비난하며 만일 그때에 있었더라면 선지자들이 피 흘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침례 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라 믿기도 했습니다. 요한 앞에 나아가 침례를 받으려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요한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비난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그들의 태도를 위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의 비석을 꾸미며 선지자의 정신을 따르는 것은 결국 자신을 꾸미기 위한 장식에 불과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옳고 그른 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위선은 일반적으로 대중의 판단에 편승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취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마다 국가가 갱신되기 위해, 사회가 정화되기 위해, 종교가 바르게 되기 위해, 교육이 모든 이들을 위한 바탕이 되기 위해 간구합니다. 그러나 법안에 취하는 태도는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도가 과연 진실일까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위선의 경계는 항상 자기의 이익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익과 권한을 침해할 때면 불의에 편승해 의로운 자, 무고한 자와 싸우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의로운 자들의 피를 흘리는 데 주저하지 않는 위선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죽은 자는 항상 말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권력자는 힘없는 자를 죽이고 핍박을 가하고 무력으로 양심과 도덕을 짓이깁니다. 실제로 무고한 사람의 죽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헛된 죽음으로 치부될 뿐입니다.

하지만, 의로운 죽음, 무고한 죽음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죽음에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벨의 죽음은 가인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찾았고 아벨의 피가 탄원한다고 말씀하시고 가인을 저주하셨습니다. 의로운 자 혹은 무고한 자의 죽음이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고 그 진노가 재앙이 됐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결국 자신의 위선을 만들어내고 의인 혹은 무고한 자를 탄압하는 자들에게, 이 시대의 악행에 침묵하는 자들에게 던져진 주님의 저주입니다.

오늘날 무고한 한 농민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슬퍼하고 가족들이 슬퍼합니다. 분명히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언제나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지만 가해자는 없고 다들 선의의 피해자라 말하며 애써 모른 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세대에 그 피가 돌아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위선자가 아닌 정의로운 교인, 시민, 국민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오늘을 살아가길 바랄 뿐입니다.

서순열 목사 (구리 동부순복음교회)

◇약력=△한세대 신학대학원(MDiv) 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