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김영석] 탈북 러시, 미래 아닌 현실이다

입력 2016-10-19 17:33

“대한민국으로 오라.”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많이 쓰는 말이다. 북한 주민들을 향해서다. ‘북한=지옥’이라는 프레임을 앞세웠다.

때마침 탈북 소식도 늘었다. 북한대사관 공사, 북한 보건성 출신 간부, 국가안전보위부 검열단 여성 통역요원 등이 대한민국 외교공관의 문을 두드렸다. 고위급 인사의 탈북은 올해 상반기에만 10명에 육박한다고 한다. 역대 최고 수준이다. 소위 ‘금수저’들의 탈북이다.

탈북자 3만명 시대를 맞아 탈북 동기도 변하고 있다. 배고파서 남한을 찾던 흙수저들의 생계형 탈북 대신 ‘좋은 삶’을 위한 이주형 탈북이 대세다. 하나원 수료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는 이를 잘 말해준다. ‘경제적 어려움’을 탈북 이유로 꼽은 경우는 2001년 이전 66.7%에서 2014∼2016년 12.1%로 감소했다. 반면 ‘좋은 삶’을 동기로 답변한 비율은 2001년 이전 33.3%에서 2014∼2016년 87.8%로 늘었다. 이주형 탈북의 일상화 시대다.

일각에선 내년 1∼3월이 탈북 러시의 본격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한다. 북한 내부의 미묘한 변화와 맞물려 두만강이 얼어붙는 이때가 탈북의 최적기라는 것이다. 지난달 발생한 두만강 유역의 대홍수 참사 피해자들이 1순위로 꼽힌다.

벌써 탈북자 10만명 시대를 이야기하는 이도 있다. 한 야당 중진의원은 탈북자 10만명 시대가 오면 서울 시민들의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고까지 우려한다. 우리 정부의 준비 부족을 지적한 말이다.

준비 부족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통일부의 내년도 탈북자 정착금 예산은 올해보다 99억1100만원 줄어든 591억4100만원으로 편성됐다. 통일부는 내년에 1300명의 탈북자가 발생할 것으로 봤다. 올해 예상되는 1500명보다 200명이 줄어든 수치다. 대량 탈북 대비는 관심 밖인 셈이다. 주무 장관은 “대량 탈북은 없다”고 용감하게 단언했다.

1997년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후 정부의 탈북 정책은 큰 변화가 없었다. ‘현금만 쥐어주면 그만’이라는 정책 중심이었다. 기본금 700만원에 주거지원금 1300만원을 받아든 탈북자가 생계를 제대로 꾸려갈 리 만무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탈북자들의 고용률은 54.6%, 월평균 임금은 154만6000원이다. 탈북 엘리트도 하나원을 나서는 순간 한국사회의 마이너리티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정부는 ‘컨틴전시플랜(비상계획)’이 있다고 항변한다. 구체적 계획은 ‘말할 수 없다’이다. 정부 당국자끼리 쉬쉬하면서 대처할 단계는 이미 지났다. 국민적 동의를 거친 플랜 마련이 필요하다. 탈북촌 건설도 쉬쉬하다간 제2의 사드(THAAD) 꼴이 날 수 있다. 혐오시설로 낙인찍혀 건설 자체가 쉽지 않다. 지방자치단체와의 사전 협의도 필수다. 탈북촌 재원 마련도 공개 추진이 필요하다. 통일세가 되든 평화통일국채가 되든 논의를 이제 시작해야 한다. 차기 정부에 짐을 전가해선 안 된다.

정부의 원보이스(One-Voice)도 필요하다. ‘대통령 말 따로, 통일부 장관 말 따로’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의 ‘탈북 권유 발언’은 탈북 흐름에 역효과가 날수 있다. 대통령은 뒤로 물러서고 정부 당국자들이 앞서야 한다.

탈북이 늘어난다고 김정은 체제가 곧바로 흔들린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오판이다. 탈북 러시가 체제 붕괴로 이어지는 트리거(trigger·방아쇠)가 아니라는 말이다. 조용하면서도 체계적인 준비가 우선이다. 댐에 금이 간 자국이 보였다면 땜질이 아닌 홍수를 대비할 때다.

김영석 정치부장 y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