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그날도 배가 고팠다. 가출 후 반년 가량 떠돌다 노원나눔의집에 오게 된 날이었다. 로만 칼라의 검정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소년을 맞았다. “배 고프지?” 그는 더운밥에 계란 프라이를 올린 뒤 마가린과 간장을 넣고 비볐다. 소년은 허겁지겁 그 밥을 먹었다. 배불리 밥을 먹은 뒤 소년은 어렴풋이 느꼈다. 이 세상 모두가 자신을 외면한 건 아니라고.
1999년 초의 일이다. 소년은 이곳에서 이 남자와 살며 청소년기를 보내고 대학에 갔다. 소년은 이제 한 아들의 아버지가 된 문용식(30·직업군인)씨다. 남자는 대한성공회 서울 노원구 노원나눔의집과 노원나눔교회 설립을 주도한 김홍일(56) 사제이다. 문씨는 18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노원나눔의 집에서 처음 ‘사랑’이라는 걸 느꼈다. 나도 앞으로 그런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반년 동안 동네 주민들 얼굴 익힌 뒤 설립
문씨처럼 외롭고 지친 이들과 함께해온 노원나눔의집과 노원나눔교회가 올해 설립 30주년을 맞았다. 김근상 대한성공회 주교는 지난달 24일 노원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30주년 기념행사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일해 온 나눔의집의 사제, 사역자, 봉사자, 교인들에게 감사한다”며 “우리의 사역은 작았지만 그 사역에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1986년 노원구 상계동은 대표적 빈민 주거지였다. 날품팔이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이들과 도심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김 신부 등 청년 4명은 거의 반 년 가량 지역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나눴다. 웬만한 동네 사람들의 얼굴을 다 익힐 무렵 나눔의집 문을 열게 됐다. 김 신부 등 청년들의 선교 의지와 성공회 서울교구의 빈민 목회 지원가 만남으로써 얻은 결실이었다.
나눔의집은 나눔교회의 영성을 바탕으로 지역선교에 집중했다. 나눔의집은 이듬해 영세 하청공장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야학, 지역 주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마을문고, 맞벌이 부부들이 자녀를 맡길 수 있는 탁아소를 시작했다. 이태 뒤에는 탁아소를 청소년 공부방으로 전환하고 가정결연사업을 시작했다.
노원나눔교회는 영성의 샘
89년부터 가정결연사업 활동가로 참여한 강신저(44)씨의 회고다. ‘첫 번째 방문한 집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부엌이라고 하기 힘든 쪽방에는 음식물 쓰레기가 쌓여 있었고, 죽은 쥐가 썩어가고 있었다. 방은 쓰레기, 옷, 이불 더미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는 “아이들이 그런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는 데 충격과 슬픔을 느꼈다. 그 아버지도 몸이 아파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었다”고 기억했다. 나눔의집 결연사업팀은 이 가정에 가사와 간병도우미를 지원했고, 아버지가 기초생활 수급자로 지정될 수 있도록 도왔다. 생활 지원과 상담 교육 등을 통해 결연가정을 하나 둘 세워나갔다.
93년에는 ‘다솜나누기’란 봉사조직을 꾸렸다. 자원봉사자들은 각자의 재능과 시간을 가정결연을 맺은 가족들과 나누었다. 봉사자들은 어르신들의 나들이를 동행하고, 텃밭을 가꿀 수 있도록 도왔다.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 장례도 치렀다. 결연가정의 한 어머니는 장애를 가진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병을 앓던 어머니는 임종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부님(김홍일 사제)과 노원나눔의집이 있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노원나눔의집이 결연가정에 얼마나 큰 힘이 됐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상계동 시작 나눔의집, 10개소에 143개 사업
나눔의집은 91∼92년 지역 초등학교에서 ‘상계마을 주민 단오 큰 잔치’를 열었다. 주민 2000여명이 참여했다. 행사는 지역 단체와 주민들이 ‘주민단체협의회’를 조직한 계기가 됐다. 93년에는 주민들이 참여하는 봉제생산협동조합 ‘실과 바늘’을 만들었다. 생계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뒤이어 건설공동체 ‘나눔건설’, 도시락배달업체 ‘사랑의 손맛’ 등이 만들어졌다.
지역 아동과 청소년들을 돌보는 일도 열심히 해왔다. 초등학생을 위한 공부방 ‘엄마사랑지역아동센터’, 청소년교육지원센터 ‘나란히’, 위탁형대안학교 ‘나우학교’ 등이다. 20년째 나눔의집에서 활동하는 김지선(52) 노원청소년지원센터 센터장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공부하고 사고하며 놀이하는 것을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둔다”고 말했다.
30주년 기념행사장 입구에는 청소년들이 직접 마든 쿠키, 비누 등을 팔고 있었다. 나란히 센터에 다니고 있는 강경옥(16·영진간호고)양은 “겨울방학 여행 프로젝트를 위해 비용을 모으는 중”이라며 활짝 웃었다. 나란히센터 간사 중에는 이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도 있다. 성공회는 상계동을 시작으로 동두천 인천 등에서 10개 지역에 나눔의집을 운영, 현재 143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봉지쌀 사들고 비탈길 오르는데/ 까닭 없이 가난한 옛 기억들 아련히 떠올랐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비탈길 오르며 근본으로, 근본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가난을 만납니다.’ 노원나눔의집을 20년가량 지킨 김 사제가 쓴 시 ‘가난한 노래’ 서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상계동 언덕에 심은 ‘사랑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면서 무성한 가지를 뻗고, 그 열매를 알알이 맺어가고 있다.
■ 오상운 노원나눔의집 원장사제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와 함께…”
오상운(사진) 노원나눔의집 원장사제는 현재 노원나눔교회 관할사제로서 목회를 하고, 가정결연 등 나눔의집 산하 10여개 기관을 총괄하고 있다. 오 사제는 인터뷰에서 “우리 교회는 삶 속에서 정의를 실천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며 “나눔교회는 나눔의집의 한 지체로서 신앙을 고백하고, 나눔의집은 사회선교에 힘쓴다”고 소개했다.
나눔교회가 나눔의집 안의 ‘영성의 샘’인 셈이다. 그는 “예수님이 가난하고 억압받은 이들과 함께한 것처럼 나눔의집은 그런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 노력해온 것 같다”며 “앞으로 어떻게 이 신앙고백과 선교를 아름답게 이어가느냐하는 것이 30주년을 맞는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나눔의집은 외형적 성장을 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원 지역주민과 연계한 10여개 사업장을 꾸리고, 100여 가정을 돌보고, 연간 수 천 명의 청소년과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인문학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오 사제는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공동체를 추구했는데 나눔의집은 지금 매우 커졌다”며 웃었다. 그는 60여명의 상근자들이 더 깊은 영성을 갖고, 나눔의집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역에 퍼뜨릴 방안을 고민 중이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한국의 공교회-노원나눔의집] 장애 아들 둔 어머니 “노원나눔의집이 있어 편안히 임종”
입력 2016-10-18 2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