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졸업 무렵 동기들의 최대 관심은 결혼이었다. 이미 3분의1 정도는 결혼을 위해 중퇴한 상태였다. ‘결혼을 하지 않고 김활란 박사나 박에스더 선생처럼 당당하게 사회 활동을 할 거야.’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같은 학교 동기 김봉화와 나는 박에스더 선생의 제안으로 서울 명동의 YWCA에서 수습간사로 일하게 됐다. 1949년 7월 졸업 후 명동 YWCA 숙소로 짐을 옮겼다.
우리는 화로에 불을 피워 밥을 지어 먹었다. 그야말로 ‘자취’였다. 미·소 양국이 설정한 군사분계선인 38선을 기준으로 국토가 분단된 뒤 이북에서 월남하는 이들이 나날이 늘어났고 서울 거리는 인파로 넘쳐났다. 나와 봉화는 천막촌에 사는 월남가족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짝짜꿍’ 등의 노래와 놀이를 가르쳤다.
이듬해 6월 화창한 일요일, 라디오에서 북한 공산군이 남침했다는 긴급 보도가 전해졌고,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국군은 철통같은 태세를 갖추고 수도 서울을 사수합니다. 국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각자의 자리를 지켜주기 바랍니다.” 하지만 바로 이튿날 한강 철교가 끊겼고 서울은 하룻밤 만에 공산 치하가 됐다. YWCA 건물도 붉은 완장 두른 낯선 사람이 점령했다.
박 선생은 미군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고, 만삭이던 YWCA 최예순 회장은 해산한 지 사흘 만에 납북됐다. 나는 언니와 지내다 불안한 마음에 서울역 근처 김재준 목사의 집을 찾았다. “목사님,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요?” 많은 말씀을 하진 않았지만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잠깐의 대화 후 작별 인사를 했다. 김 목사는 “몸조심 하라우”하시며 작은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종이를 펴봤다. 굳은 분유 한 덩어리였다. 눈에 뜨거운 것이 고여 왔다. ‘당신도 배를 곯고 계셨을 텐데….’ 인생의 어떤 순간에 받은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답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 분유 덩어리 조각이 그렇다.
고향 전북 이리에 피신해 무료하던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이리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와달라고 했다. 1951년 3월 개학식에서 부임 인사를 하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우체국에 들렀더니 우체부 한 사람이 내게 두툼한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이 영어 편지 누구에게 온 건지 봐주세요.” 그 고장 사람들은 내가 영문과 나온 것을 다 알았기에 부탁한 것이었다.
발신인과 수신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미국 뉴욕 YWCA본부가 내게 보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수습간사를 위한 유학 서류였다. 초청장과 장학금증서 등 여권 수속에 필요한 일체의 서류가 있었다. 여권을 발급 받기 위해 임시수도 부산으로 내려갔다. 어딜 가나 피난민이 있었다.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모든 언덕과 산은 판잣집으로 뒤덮여 있었다.
거리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이상하리만큼 활기찼다. 한국인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여권 발급 면접은 당시 외무부 장관이 직접 했다. 그때는 장관이 인터뷰할 만큼 유학생이 희귀했기 때문이다. 여권을 내게 건네준 실무자가 말했다. “당신은 20세기 행운아요.” 나는 그렇게 유학을 가게 됐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현자 <5> 임시수도 부산에 내려가 미국 유학 여권 받아
입력 2016-10-17 2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