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찬희] 장래희망

입력 2016-10-16 18:25 수정 2016-10-16 21:41

늘 ‘과학자’였다. 초등학교 4학년쯤부터인 걸로 기억난다. 성적표에 학생과 학부모의 장래희망을 적는 공간이 있었다. 한 번도 변치 않고 과학자라고 답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동네서점에서 우연히 보게 된 ‘월간 사이언스’ 잡지는 구체적인 색깔을 입혀줬다. 대부분 이해하기 힘든 글들이었지만 읽고 또 읽었다. 그중에서도 유전공학 얘기가 가슴에 꽂혔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과를 선택했고, 생물과 화학시간은 참 즐거웠다. 두꺼운 안경알의 검정 뿔테를 낀 생물교사는 교과서에 없는 ‘유전자(DNA)의 세계’를 알려줬다. 대학 전공을 생화학으로 정한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의대나 치대를 가라는 주변 권유는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대학에선 과학자를 꿈꾸는 학과 동기 39명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과학자의 길을 걷고 있을까. 지난해 여름, 오랜만에 만난 동창과 어림해봤다. “우리 학번 중에 생화학이나 유전공학, 분자생물학 쪽에서 일하는 친구가 몇 명이나 되지?” “글쎄, 10명도 채 안될 텐데.” “의대로 편입한 친구들과 아예 다른 학과로 간 녀석들, 졸업하고 전혀 관계없는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지.” “한국에 돌아와서 연구원이나 교수 하는 친구는 없나?” “두세 명 수준일 걸.”

고백건대 과학, 과학자의 길은 간단치 않았다. 석사, 박사를 거쳐 박사후 과정(포스닥)을 마쳐도 대학교수나 연구원 자리를 잡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가장 먼저 사라진 일자리는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연구원이었다.

40명 모두 생화학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상당수가 의대로 편입했다는 건 서글픈 결과다. 그런데 아내가 전해준 어떤 학부모 모임의 얘기는 더 살벌하다. 중학교 어느 반에서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었단다. 의사, 판사, 변호사, 공무원, 교사 순서로 답했다. 과학자라고 말한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석·박사 마치고 와봐야 교수 아니면 연구원이지만, 로스쿨이나 의대 가면 평생이 보장된다’는 게 그날 모임의 결론이었다.

적나라한 통계도 있다. 지난 5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국민의당 신용현 의원은 자료를 하나 공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과학기술 특성화대학 5곳(한국과학기술원, 울산과학기술원, 광주과학기술원, 대구경북과학기술원, 포항공대)의 졸업자 중 833명이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이나 의학·치의학·한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과학에 미래가 없다고 본 것이다.

한심한 얘기도 있다. 지난 3월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이 끝나고 1주일도 안 돼 정부는 인공지능 연구에 1조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포켓몬 고’가 주목받자 가상·증강현실 산업에 5년간 4050억원을 들여 국가전략산업으로 키우겠다고 발표했다. 유행을 좇기 바쁘고 ‘창조경제’ 같은 구호에 매달리느라 ‘미래’를 통찰할 시간은 없다.

얼마 전 일본의 오스미 요시노리 도쿄공업대학 특임교수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자 ‘왜 우리는 노벨 과학상을 받지 못하느냐’는 반성과 질타가 넘쳐났다. 지난해, 지지난해에도 그랬다. 그리고 금세 잊어버린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굉장한 ‘놀부 심보’다. ‘과학의 언어’인 수학을 선행학습하며 질려버리게 만드는 교육 시스템에서 노벨상을 바라는 건 억지 아닐까. 과학교육을 혁신하고, 과학기술에 제대로 투자하며, 과학기술 흐름을 통찰하는 국가적 리더십이 없는데 뭘 기대하는 걸까. 내 아이가 장래희망을 과학자라고 말해도 놀라지 않고 싶다.

김찬희 사회부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