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장 70년 재위 푸미폰 국왕 서거… 泰, 통곡의 바다

입력 2016-10-14 00:44
태국 국민들이 13일(현지시간) 밤 수도 방콕의 시리라즈 병원 앞에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별세 소식을 듣고 오열하고 있다. 70년간 태국을 통치해 온 푸미폰 국왕은 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였다. 최근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시리라즈 병원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쾌유를 바라는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AP뉴시스

세계에서 가장 오래 재위(70년)한 푸미폰 아둔야뎃(88·사진) 태국 국왕이 13일 서거했다. 그는 입헌군주로 실권을 쥔 통치자는 아니었지만 수차례 정치적 격변 속에서 중재자로 나서 나라를 안정시키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한 태국 국민의 아버지였다. 그의 서거 소식에 태국 전체가 통곡의 바다로 바뀌었다.

AP통신에 따르면 태국 왕실 사무국은 국왕이 이날 오후 3시52분 수도 방콕의 시리라즈 병원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푸미폰 국왕은 2009년부터 건강이 나빠져 자주 병원 치료를 받았고 공개석상에 나오는 일도 급격히 줄었다. 지난해 담낭 제거 수술을 받았고 지난달에는 폐에 물이 차고 신장 기능이 약해졌다. 지난 8일에는 인공호흡기를 부착했고 왕실 사무국이 국왕의 상태가 불안정하다고 밝혔다.

쁘라윳 찬 오차 태국 총리는 1년간 애도 기간을 가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 왕위 승계와 관련해 “국왕이 1972년 후계자를 지명했음을 국가입법회의에 통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푸미폰 국왕은 장남 와치라롱껀(64)을 왕세자이자 후계자로 지명했다.

많은 시민들이 시리라즈 병원으로 몰려가 눈물을 흘리며 국왕의 죽음을 애도했다. 장례 일정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푸미폰 국왕은 1946년 친형인 아난다 마히돈 국왕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갑작스럽게 즉위했다. 이후 태국은 무려 19차례의 쿠데타를 겪었다. 이 혼란 속에서 국왕은 흔들림 없는 중재자이자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젊은 시절에는 지방 순시를 나가 가난한 농민과 소수민족의 생활상을 직접 보고 그들의 애로사항을 들었다. 이를 토대로 왕실 주도의 개발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다양한 개발사업 가운데 고산족의 복지를 개선한 공로로 1988년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2006년에는 극빈자와 취약계층을 위해 헌신했다는 이유로 유엔의 ‘인간개발 평생업적상’을 수상했다.

1973년 군부가 민주화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에게 발포하자 푸미폰 국왕은 학생들이 피신하도록 궁전 문을 열었다. 92년 쿠데타를 일으킨 수친다 크라프라윤 총리가 잠롱 스리무앙 방콕시장과 첨예하게 대립했을 때는 둘을 왕궁으로 불러 꿇어앉히고 꾸짖었다. 이후 수친다 총리는 사임하고 해외로 망명했다. 나라의 위기상황에서 이처럼 국왕이 중심을 잡고 안정을 되찾으려 애쓰는 모습에 태국 국민들은 감동했다.

하지만 2006년 군부가 서민층의 지지를 받던 탁신 친나왓 총리 정부를 뒤엎었을 때와 2014년 탁신의 동생 잉락 총리를 쁘라윳 찬 오차 장군이 쿠데타로 몰아냈을 때 푸미폰 국왕이 군부 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해 논란이 됐다. 국제사회 일각에서는 태국 왕실이 경제적 특권을 지키기 위해 군부와 결탁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 군부의 인권 탄압에도 눈을 감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푸미폰 국왕은 1981년 7월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태국을 방문했을 때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받았고, 1992년에는 정부 귀빈 자격으로 공식 방한한 바 있다.

태국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해 온 푸미폰 국왕이 사라짐으로써 태국 정정이 혼란스러워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왕위를 승계할 예정인 와치라롱껀 왕세자는 사치와 월권, 잦은 이혼 등으로 국민들로부터 널리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푸미폰 국왕은 왕세자 이외에 3명의 공주를 뒀다. 공주들 중 셋째인 짜크리 시린톤 공주가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