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a, don’t preach’. 팝스타 마돈나가 1988년 발표해 크게 히트한 노래 제목이다. 이 제목처럼 현대인들은 듣기 싫은 잔소리를 들을 때 종종 “설교하지마”라고 말하곤 한다. 언제부터인가 ‘설교’는 이처럼 부정적 개념으로 통용되어 왔다. 이는 설교가 그 형식면에서 지루하고 그 내용 면에서 고압적이며 진부한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여전히 이야기 듣기에 열광한다. 많은 방송 프로그램들은 말 그대로 스타 강사들의 ‘세속설교’를 전면에 내세우며 시청자들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다. 수많은 팟캐스트 방송들 역시 대안적 미디어로 수많은 팬들의 귀를 사로잡는다. 똑똑하고 말 잘하는 사람들이 일명 ‘뇌섹남’이란 칭호와 함께 전성기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걸 보면 사람들은 여전히 좋은 이야기에 굶주려 있는 것 같다.
일부 지식인들은 이런 상품화된 인문학이나 대중강연들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하지만 청중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정보보다는 공감이다. 아무리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듣는 이들의 맘에 공명되지 않는다면 그 권위자의 말은 말 그대로 ‘설교’가 되어 버린다.
교회 안에서도 설교는 양면성을 갖는다. 여전히 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목사님의 설교이며 사람들은 좋은 설교 말씀을 듣는 것을 열망한다. 반면 교회에서도 설교는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놓고 짧게 하는 설교에 성도들이 환호하기도 한다.
기독교 부흥운동은 언제나 뛰어난 설교자들을 배출하며 발전하였다. 이들은 대중적 구술 언어와 일상을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 그리고 청중을 울리고 웃길 수 있는 감정적 언변의 달인들이었다. 그래서 예일대의 역사학자 해리 스타우트는 부흥사들은 종교지도자 이상의 문화 아이콘이며, 미국 대중문화 최초의 ‘스타’(celebrity)는 무대(stage)가 아니라 강단(pulpit)에서 나왔다고 주장한다.
‘세속설교’의 출현에서 교회 설교 문화에 대한 중요한 전환이 요청된다. 물론 성서에 대한 충실한 주해와 시대를 향한 신학적 통찰은 필수적이다. 오늘날 설교가 외면 받는 이유는 설교자에게 바로 이런 예언자적 울림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모든 연령과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탁월한 이야기꾼이셨다. 공중의 새와 들에 백합도 예수께는 예술적 언어로 승화시키신다. 그분은 평범한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고 그 안에 진리를 이끌어내신다.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며 그분은 종교적 수사 대신 일상적 비유를 통해 말씀한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세속나라의 탐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민중을 향한 따뜻한 은총이 넘친다.
그래서 당시의 청중들은 예수님의 설교에 깜짝 ‘놀랐고’ 진부한 당대의 설교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는 ‘달랐다’고 말한다.(마 7:21) 오늘날 교회의 설교는 예수님의 말씀에 가까운가 아니면 당대의 종교지도자들과 유사한가? 우리는 예수님의 눈과 귀와 입을 본받아 복음이 진부해진 이 시대에 교회 안과 밖에서 창의적인 스토리텔러가 되어야 한다.
<윤영훈 빅퍼즐문화연구소장>
[윤영훈의 컬처 토크] 이야기의 힘
입력 2016-10-14 2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