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중국 양나라 ‘양직공도’(梁職貢圖)에 등장하는 사신은 대부분 맨발이다. 백제 사신은 신발을 신고 있다. 언뜻 보더라도 백제 사신의 신발은 남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죽신발(革履)이나 짚신(草履)을 신었다. 가죽이 풍부하고 추운 북쪽지방에서는 가죽신을 주로 신었다. 덥기도 하고 가죽도 부족했던 남쪽지방에서는 짚신을 주로 신었다.
우리나라 신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 온 것은 고무신이다. 1908년 일본에서 고무신을 수입했다. 1920년에는 우리식으로 개량하고 대륙고무공업소에서 대량생산하면서 국산화한다. 1960년대 굽이 있는 힐고무신이 등장하면서 다시 한 번 인기를 끈다. 197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을 거치면서 고무신은 일상생활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선교역사에는 고스란히 남았다.
1891년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 수곡리에서 태어난 문준경은 1908년 지도면 등선리(현 신안군 증도)로 시집간다. 신혼 첫 날부터 겉도는 남편 때문에 시름 깊은 나날을 보낸다. 측은히 여긴 시아버지 정기운은 문준경에게 글공부를 시킨다. 시아버지 3년 상을 끝낸 1927년 문준경은 오빠가 살고 있는 목포로 나간다. 목포 북교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뒤 1931년부터 방청생 자격으로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다. 신안군 섬을 돌면서 임자진리교회(1931), 증동리교회(1933), 대초리교회(1935) 등을 개척한다.
어느 날 노두길을 걷다가 넘어져 갯벌에 고무신이 벗겨졌다. 꽁꽁 언 벌판을 걷다가 동상에 걸렸다. 사시사철 빠지고 미끄러지면서 항상 발이 삔 상태였다. 그런데도 기도하면 병자가 낫고 귀신이 물러갔다. 그래서 한 해에 무려 아홉 켤레나 되는 고무신이 닳아 없어졌다. 사도 바울의 사역을 사도행전이라 한다. 문준경 전도사의 사역은 ‘고무신행전’이라 한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9월 문준경 전도사는 공산당에게 붙잡혀 목포에 있는 정치보위부로 끌려간다. 목포에 도착했을 때 공산당은 이미 철수하고 없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급히 후퇴한 것이다. 문준경 전도사는 10월 배를 타고 다시 증도로 들어간다. 10월 5일 새벽 2시 씨암탉이라는 조롱을 받으면서 죽창에 찔리고 총에 맞아 순교한다. 증도에는 사찰이나 담배 가게가 없다. 여타 섬과 달리 풍어제를 지내지도 않는다. 증도 주민 90%가 그리스도인이다. 천사의 섬이라 부른다.
최석호 <목사·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
[최석호의 골목길 순례자-고무신 길] 문준경 전도사의 ‘고무신 행전’
입력 2016-10-14 2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