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현자 <3> 해방 후 아펜젤러 선교사의 딸에게 영어 배워

입력 2016-10-13 21:35
이리여고 2학년 때 의자매를 맺었던 언니와 함께한 김현자 전 국회의원(왼쪽). 당시 이리여고는 일본인이 다수였기 때문에 조선인들끼리 더 의지하며 지냈다.

“센진노 구세니.” 이리여고에 다니던 시절 일본인 동급생들은 나를 보며 이렇게 입을 삐죽거렸다. ‘조선인 주제에’라는 뜻이었다. 이리여고는 일인 여학교였다. 일본인들과 일본어로 공부해야 하는 곳이었다. 나는 일어 작문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작문을 써내면 일본인 교사가 칭찬을 하고 다른 반에 가서 내 글을 읽어주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동급생들은 나를 못마땅해 했다.

제 나라 없는 서러움이다.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렘 4:19) 여고 시절 내내 주눅들어 지냈다. 소수의 조선 여학생들은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1941년 말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됐다. 사회 전체가 전시체제로 바뀌었다. 근로봉사라는 명목으로 모 심기 등을 하러 다녔다. 여고 졸업 후 1945년 초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경성여대. 현재의 이화여대다. 일제가 ‘이화’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도록 했던 때다.

첫 학기, 한국인 교수들이 서툰 일본어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일제의 황민화정책 일환이었다. 여교수들은 ‘몸뻬(고무줄 바지)’를 입고 수업을 했다.

고교와 다르지 않은 대학의 모습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그해 여름 방학, 고향에 있는 동안 8·15 해방을 맞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교명이 복원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두달만에 다시 간 학교는 전혀 다른 곳 같았다.

나는 조국의 해방이 감격스러웠다. ‘이화’라는 이름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입김으로 축출 당했던 교수들도 돌아왔다. 박마리아 김활란 김영의 장영순 김신실…. 여교수들의 활기가 나를 들뜨게 했다. 600여명의 재학생 중에는 여고를 갓 졸업한 이도 있었지만 중국 만주 등으로 떠났다가 해방을 맞아 모국으로 돌아온 이도 있었다. 조병옥 여운형의 딸도 있었다.

나는 영문과였다. 동기 중엔 이효재도 있었다. 여고 시절 영어를 거의 배우지 못했던 우리는 기초부터 배워야 했다. 영문과 교수 중에는 김상용(1902∼1951)의 인기가 최고였다.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오/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구름 꼬인다 갈 리 있오/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왜 사냐건 웃지요.’

유명한 그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오(1934)’다. 김 교수는 수업 시간에 짙은 눈썹에 사색 잠긴 깊은 눈으로 영시를 외우곤 했다. 나를 포함한 동급생은 거의 모두 그런 그의 모습에 굉장히 매료됐다. 학생들은 주로 한복을 입고 다녔다. 나는 어머니가 분홍, 자주색으로 물들여준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받쳐 입었다.

3학년 때부터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딸 엘리스와 자넷 C 헐버트 선교사 두 분이 우리에게 영어 회화를 가르쳤다. 본토 발음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궁핍했던가. 해방 직후 이북에서 갑자기 송전을 중단했다. 남한 전체가 한동안 암흑 속에 지내게 됐다. 전기가 없으니 물이 안나오고 물이 안나오니 난방도 안되고 화장실도 쓸 수 없었다. 식량도 부족했다. 기숙사 식당에선 일주일에 서너 차례 밥 대신 멀건 우거지죽이 나왔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