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28년 전북 김제시 죽산면에서 태어났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부잣집이라고 했다. 땅도 적잖게 있고 머슴도 여럿 있었다. 동네에서 하나밖에 없는 유성기와 라디오가 있었다. 라디오의 안테나 높이는 10m는 족히 됐다. 저녁이면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 기계에서 나는 신기한 소리를 듣기 위해 모여 들었다.
우리 집은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 사랑채, 바깥채가 있었다. 사랑채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고 김석준)가 계시고, 바깥채에는 머슴들이 살았다. 안채에는 할머니가 기거했다. 나는 언니, 할머니와 주로 지냈다. 어머니(고 은애정)는 아버지의 방보다는 할머니의 방에서 우리와 자는 날이 많았다.
“네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내가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들은 말이었다. 아버지는 장남이었다. 가문의 대를 이으려면 우리 부모님이 아들을 낳아야했다. 집안의 큰 바람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만 줄줄이 낳았다. 나는 둘째 딸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남아선호사상이 극심했던 그 시절,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자는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동진수리조합이라는 일본 회사에 다니던 아버지는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했고 머리가 영특했다. 아버지의 서재에는 셰익스피어 전집 등이 꽂혀있었다. 지식인이었다.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아버지보다 다섯 살 위인 어머니는 한글을 깨친 정도였다. 아버지의 눈에는 어머니가 성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와 별거했다.
어느 날 곱상하게 생긴 젊은 여자가 갓난아기를 안고 우리 집에 왔다. 어머니를 보더니 대뜸 그 아기를 안겼다. “형님, 이 아이를 부탁합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묵묵히 받아 들었다. 아버지가 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앗(첩)을 보는 것도 자신의 운명이라고 여기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애처로웠다.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아버지에게 화가 났다. 칠거지악이라는 명목으로 여자를 옥죄는 사회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어머니는 순종하고 인내했다. 그 시대 모든 어머니들처럼. 지금도 어머니라고 하면 ‘인(忍)’ 자가 먼저 떠오른다. 나는 외도하는 아버지와 인내하는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으로 가사를 멀리하고, 공부에 집중했다.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는 어진 성품을 가진 분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진 못했지만 조부모뿐만 아니라 삼촌과 고모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셨고 나는 모태신앙인으로 태어났다. 내가 댓살쯤 됐을 때 성탄절을 맞아 식구들이 김제 죽동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때 내가 강단 위에 올라가 캐럴 독창을 했다고 한다. 어떤 노랫말이었을까.
‘예수님 오신 밤, 어린 딸이 십자가 아래에서 캐럴을 부른다.’ 그걸 지켜보던 나의 어머니. 마음이 늘 가난했던 여인. 자주 눈물짓던 아낙. 기도하던 내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래도 어머니는 인생의 짐을 주님께 의탁하고 살아오셨다. 하나님의 은혜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역경의 열매] 김현자 <2> “네가 아들이었다면…”이 귀에 박힌 어린 시절
입력 2016-10-12 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