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후 서울 성동구의 청계천 하류 지역. 서울지하철 2호선 용답역 근처 운동기구를 이용하거나 천변(하천 주변)을 따라 걷는 주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후 6시쯤 해가 지자 운동하던 주민들은 천변을 떠나기 시작했다. 천변에 가로등이 없어 주변은 캄캄했고, 산책로를 따라 사람 키만한 갈대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천변을 걷던 주민들은 다른 사람들을 경계했다. 맞은편 도로에 설치된 가로등 불빛이 산책로를 비췄지만 4∼5m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서울시는 2006년 청계천 하류 약 2㎞ 구간을 ‘철새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그동안 가로등 등 조명을 설치해 달라는 주민들의 민원이 계속됐지만 서울시는 철새 보호를 이유로 조명을 설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서울시 자연환경보전조례에는 ‘철새보호구역에서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11일 “조명을 설치하면 철새 서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서울시 모니터링 결과 지난해 11월부터 지난 2월까지 3개월 동안 청계천 하류 철새보호구역에서 35종 856개체의 철새가 관찰됐다.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등 오리류가 주로 나타났다. 한국조류보호협회도 철새보호구역에 조명을 설치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본다. 협회 관계자는 “인공적인 조명 자체가 철새의 이동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며 “조명 설치를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게 맞다”고 했다.
하지만 천변 주변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잇따르고, 해가 일찍 지자 주민들 불안이 커지고 있다. 산책로에서 만난 주민 최모(43·여)씨는 “철새 보호한다고 사람은 그냥 내버려둬도 괜찮다는 얘기인가”라며 “주민들이 밤에는 무서워서 천변에 안 간다”고 말했다. 지난여름 천변에서 나체 상태로 외투만 입고 자신의 신체를 노출하는 일명 ‘바바리맨’을 두 번이나 만나 도망쳤다는 주민도 있다. 자전거를 탄 남성이 산책로를 가로막고 돈을 요구한 적도 있다고 한다.
주민들의 민원이 이어지자 경찰이 현장 답사를 실시했다. 서울 성동경찰서 범죄예방진단팀은 올해 초 청계천 하류지역을 답사한 뒤 관할구청과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등에 가로등 설치를 건의했다. 경찰 관계자는 “산책로에 조명이 없어 매우 어둡고 갈대숲이 조성돼 있어 성범죄나 강력범죄가 충분히 일어날 우려가 있다”며 “철새보호구역이라 조명 설치가 어렵다고 해 야간 순찰을 강화했다”고 말했다.
철새와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성대 조류연구소 관계자는 “가로등 같은 조명 자체가 있느냐 없느냐보다는 조명의 각도가 더 중요하다”며 “새들의 비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명을 땅 쪽으로 비추고 밝기를 낮추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인철 환경운동연합 자연생태위원도 철새와 인간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본다. 김 위원은 “선진국의 ‘철새친화적 도시 계획 매뉴얼’을 보면 보행로 주변에만 무릎 높이의 낮은 조명을 설치해 빛이 보행자만 비추게 한다”며 “철새를 보호하면서 인간의 안전도 해치지 않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은 서울시와 철새보호구역의 조명 설치에 대해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공단 관계자는 “지속적으로 민원이 제기돼 서울시에 조명 설치 예산 등을 요청해둔 상태”라며 “철새에 영향이 가지 않는 방향으로 서울시와 조명 설치를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판 기자 pan@kmib.co.kr
[기획] 가로등 없는 청계천 하류 ‘캄캄한 밤’ 논란… 켜자니 철새 떠날라, 끄자니 범죄 터질라
입력 2016-10-12 0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