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로 ‘이중섭, 백년의 신화’는 끝이 났다. 이중섭 탄생 100주년, 작고 60주년을 기념해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전시였다. 총 관람객은 25만명으로 역대 국내 작가 개인전 중 최다 관람객 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국민화가 이중섭의 첫 개인전’ ‘국내외 60여곳의 소장처로부터 모은 200여점의 원작’은 이중섭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관람해야 할 이유였다.
지난달 말 이중섭 전시를 보러 갔다. 평일이고 날도 궂어 관람객이 적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제1전시실 입구부터 촘촘히 줄지은 사람들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평소 같으면 망설임 없이 뒤돌아 갔겠으나, 이중섭 아닌가. 그의 작품을 언제 또 한자리에서 볼 수 있을까. 마치 1991년 가을 서울연극제에서 ‘길 떠나는 가족’을 본 뒤로 지금껏 그의 전시만을 기다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중섭은 변화무쌍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해내는 타고난 천재 화가이자 아내와 두 아들을 끔찍이 아끼는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다. 어릴 적부터 소를 관찰하고 그리기를 좋아했다. 해, 꽃, 나비, 새, 물고기, 게 등의 자연과 가방, 주전자, 수레와 같은 사물들, 천진하게 어울리는 벌거벗은 아이들은 그림의 단골 소재였다.
일제강점기에도 자신이 한국인임에 당당했고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이산의 아픔과 경제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생전에 그의 작품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가족을 그리워하며 홀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이다.
김갑수씨가 열연했던 연극 ‘길 떠나는 가족’에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비쩍 마른 몸의 이중섭이 작은 방에 홀로 웅크리고 있었다. 아내와 두 아들을 다시 만나겠다고 쉼 없이 그림을 그리고 어렵사리 전시를 열지만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다. 세상은 그를 반동분자, 모작꾼, 춘화쟁이, 가난뱅이라 불렀다. 결국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마저 포기한 채 식음을 전폐하고 칩거했다. “나는 세상에 아무 쓸모없는 놈” “내 그림은 엉터리이고 가짜”라고 외치며 발악하던 모습은 방금 본 듯 눈에 선하다.
그리움을 알고 봐서일까? 이중섭의 작품에는 하나같이 애틋함이 묻어났다. 서귀포 피난시절 반찬이 없어 바닷가에서 게를 잡아먹었는데 그 미안함으로 그림에 게를 그려 넣었단다. 복숭아를 따고 물고기를 잡으며 천진하게 노는 아이들은 사랑하는 아들 태현과 태성이겠다.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힘찬 울음을 토하는 ‘황소’는 그의 자화상이다. 홀로 통영에 머물면서 한창 왕성하게 작업을 하던 시절, 이중섭은 곧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득 부풀어 있었다. 아내와 두 아들을 태우고 소달구지를 모는 모습이 담긴 ‘길 떠나는 가족’처럼.
중년 부부, 초등학생, 젊은 청년, 양복 입은 직장인들, 흰머리의 노인들, 형형색색의 등산복을 입은 무리까지. 붐비는 사람들 틈에 끼어 어정쩡한 자세로 ‘국내외 60여곳’에서 어렵사리 모아온 ‘원작 200여점’을 관람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줄곧 떠나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오늘날 이중섭은 어떤 존재인가?
위작(僞作)이 많은 작가, 미술품 경매에서 자신의 작품이 고가에 팔리는 작가, 자신의 이름이 관광지 명소로 각광받는 작가, TV홈쇼핑에서 모작(模作)의 판화그림이 팔리는 작가. 천재 예술가의 비극적인 삶으로 책과 연극, 오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 이중섭. 세상과 등진 채 홀로 죽어간 쓸쓸했던 그의 마지막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지금의 광경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김윤경 광고·브랜드디자인과 계원예술대 교수
[청사초롱-김윤경] 이중섭의 쓸모
입력 2016-10-11 1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