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현자 <1> “더 늦기 전 여성운동 경험 후대에 전하고파”

입력 2016-10-11 20:23
노란 저고리에 자주빛 치마를 곱게 차려 입은 김현자 전 국회의원(가운데)이 2009년 새해 첫날 가족들과 함께한 모습이다. 김 전 의원 왼쪽이 딸 오혜련씨, 오른쪽이 큰며느리 윤혜선씨.

어느새 나도 아흔 문턱에 와 있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대과 없이 지금까지 잘 지내온 것에 감사할 뿐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올해 기력이 떨어져 밖에 나가진 않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나는 동네 노인복지회관에 ‘출석도장’을 꼬박꼬박 찍었다. 중국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전혀 몰랐던 외국어를 한두 마디 알아듣는 것은 기뻤다. 내가 중국어를 배운다고 하면 다들 되물었다. “그걸 이제 배워서 뭐하려고요?” 실용적 목표가 있어서 도전한 건 아니었다. 이웃 나라 말에 대한 관심이었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즐거움을 위해서였다. 외국어 공부가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10여년 전부터 수필 쓰는 모임에도 매주 나갔다. ‘목연회’다. 매월 셋째 목요일에 수필 쓰는 이들이 서울 인사동에 모였다. 함께 점심을 먹은 뒤 각자 써온 글을 읽고 품평을 하는 자리였다. 이 모임에 가면 문우들은 묻곤 했다. “오늘은 어디 다녀오셨어요?” 나는 ‘라인 댄스’를 배우고 중국어 강의를 듣고 왔다고 답하곤 했다.

그러면 다들 “정말 대단하세요”라며 놀라워했다. 나는 활기찬 노년이 좋다. 목연회는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국내 숙박 여행을 했다. 잘 때 따뜻하게 신을 수 있는 수면양말을 문우들에게 가져가 나눠준 적이 있다. 함께 간 이들은 “글 쓰기도 힘드실 텐데 어떻게 이런 걸 다 챙겨오세요. 호호호”하며 기뻐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밝게 웃는 걸 볼 때 행복하다.

사랑은 그런 작은 것에 있는 것 같다. 작은 아들 내외가 같은 아파트 한동에 살고 있다. 자주 나를 찾아온다. 딸은 매 주말 와서 말벗이 돼준다. 고마운 일이다.

지난주 딸은 ‘역경의 열매’ 연재 요청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처음엔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더 늦기 전에 내 자녀와 손자녀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남기고, 여성 후배들에게 내 경험을 들려주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이들을 많이 만났고, 근사한 기회를 과분하게 누렸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6·25 전쟁 후 YWCA에서 일했고, 국회의원이 된 뒤 이태영(1914∼1998) 박사 등과 함께 여성 관련 법 개정에 힘썼다. 치열했던 시간이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 시간들도 쏜살같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지금 기뻐하고, 감사하고, 사랑해야 할 이유이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구 중 하나다. 창밖으로 청명한 가을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오늘에 감사한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약력=△1928년 전북 김제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1949), 미국 컬럼비아대 사범대학원 수료(1952) △세계YWCA 실행위원, 한국전문직 여성클럽(BPW) 창립회장, 유엔세계여성대회 한국수석 대표, 11·12대 국회의원, 한국여성정치연맹 총재, 여성가족부 정책자문위원 등 역임 △YWCA대상(2003) △현 한국YWCA연합회 명예연합위원, 서울 영락교회 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