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이슈] 지지율 ‘정점’ 쳤지만… 오바마의 레임덕

입력 2016-10-10 17:15

임기 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안팎에서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오바마의 리더십은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의 핵심 정책들은 표류하거나 비판받고 있다. 퇴임을 100여일 남겨둔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지만 그의 정치적 입지는 급격히 좁아지고 있다. 차기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등장하는 다음 달 8일 이후 오바마 대통령의 국정 추진력은 더욱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미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오바마의 시대도 저물고 있다.

‘시리아 평화’는 오바마 임기 내 불가능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5년째 내전이 격화되고 있는 시리아 사태는 ‘무기력한 오바마 외교’의 상징이 돼버렸다. 오바마 대통령의 퇴진 요구에 맞선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을 업고 자신에 저항하는 반군세력과 거점지역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면서 오바마의 평화 구상은 좌절됐다.

미국과 러시아가 체결한 시리아 휴전 협정은 미군의 시리아 군 기지 오폭을 계기로 휴지조각이 됐다. 유엔에 따르면 시리아 정부군의 반군 공습이 재개된 지 20일 만에 민간인 376명이 숨지고 1200여명이 다쳤다. 480만명을 넘어선 시리아 난민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앞으로 미군이 시리아 정부군 영역을 공습할 경우 방공 미사일로 요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과 러시아가 시리아에서 군사적으로 직접 충돌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는 실제 반경 400㎞ 안으로 날아오는 미사일과 전폭기 등을 요격할 수 있는 신형 방공시스템 S300, S400을 지난 4일(현지시간) 시리아에 배치했다.

러시아는 또 크루즈 미사일을 장착한 함정 3척을 시리아 연안에 집결한 러시아 해군 선단에 합류시키고, 전투기와 폭격기도 시리아에 증강 배치했다.

미-러 관계는 냉전 이후 최악

미국 국토안보부와 국가정보국은 지난 7일 성명을 내고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 해킹의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러시아에 보복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미 의회도 러시아를 겨냥한 사이버범죄 제재 법안을 마련 중이다.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사이버전쟁과 그로 인한 후폭풍이 불어 닥칠 조짐이다.

전문가들은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냉전 이후 가장 나빠졌다고 우려하고 있다. 앞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3일 미국과 체결한 무기급 플루토늄 폐기협정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틀 후에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가 미국과 러시아 간 원자력·에너지 분야 연구협력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자칫 미·러 간 핵무기 확충 경쟁이 재개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오바마에게 노벨 평화상을 안겼던 ‘핵무기 없는 세상’의 구호가 요원해진 것이다.

이스라엘 오바마 무시하고 정착촌 건설 강행

백악관은 지난 6일 이례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 성명을 내놨다. 이스라엘이 서안지구에 정착촌 건설을 강행하는 것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2국가’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백악관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2009년 6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영구 평화협정에서 영토문제를 다룰 때까지 새로운 정착촌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발언을 상기시켰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을 분노하게 만든 건 네타냐후 총리의 약속파기 타이밍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이스라엘에서 네타냐후 총리를 만나 향후 10년간 미국이 이스라엘에 38억 달러(4조3500억원) 규모의 항공 군수 지원을 하기로 협약을 체결했다. 미국이 특정 동맹국을 위한 단일 군수 지원 협약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2국가 원칙’ 준수를 당부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이 귀국하자마자 그의 요청을 정면으로 묵살하는 행동을 단행한 것이다. CNN은 네타냐후 총리가 오바마 대통령에게 모욕을 줬다고 보도했다.

필리핀의 두테르테는 또 오바마에게 욕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지난 4일 연설 도중 오바마 대통령을 지칭하며 “지옥에나 가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미사일 등 무기 판매를 미국에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고 말한 뒤 오바마 대통령에게 육두문자를 던졌다. 그는 그러면서 “미국이 무기를 팔지 않으면 러시아나 중국을 찾아가겠다”며 “2014년 체결한 ‘미국-필리핀 방어강화협정’도 재검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달에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오바마 대통령에게 ‘개XX’(son of a bitch)라는 욕설을 날린 적이 있다.

그가 취임한 뒤 마약사범 3400명을 총살했는데 재판을 거치지 않은 이런 처형이 반인권적 행태라고 미국이 지적하자 오바마 대통령에게 원색적으로 욕을 한 것이다.

빌 클린턴, “오바마케어는 미친 짓”

오바마를 난처하게 만드는 건 해외 지도자들만이 아니다. 자신의 승계자를 자처하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의 남편이자 전직 대통령인 빌 클린턴이 오바마의 핵심 정책인 오바마케어(건강보험개혁법)를 원색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지난 3일 미시간에서 열린 선거 유세에서 오바마케어의 실패를 지적하며 “세상에서 가장 미친 짓”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갑자기 2500만명이 건강보험에 가입하고 또 파산한다”며 “일주일에 60시간 일하고도 보험료는 갑절로 뛰고 보상금은 절반으로 깎인다”고 오바마케어를 비판했다.

빌 클린턴의 비판에 공화당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클린턴의 발언을 들어봤나. 오바마케어는 폐지돼야 한다”고 공세를 폈다.

오바마케어를 이어가겠다고 말한 힐러리 클린턴은 난처한 입장이 됐다. 그는 “남편 클린턴의 말은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는 취지였다”고 해명했지만 오바마가 업적으로 자부하는 건강보험 개혁은 여야로부터 모두 실패로 규정됐다.

미 의회, 오바마의 거부권 행사 첫 무력화

미 의회는 지난달 28일 오바마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9·11소송법을 재의결했다. 상·하원 모두 압도적 표차로 오바마의 거부권을 무력화시켰다. 미 의회가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을 뒤집은 것은 그의 임기 중 처음이었다.

의회가 대통령의 거부권을 누르려면 재적 3분의 2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야당인 공화당이 상하 양원에서 과반을 차지하며 주도권을 갖고 있지만 민주당의 참여 없이는 거부권 행사를 봉쇄하기 어렵다. 하지만 상원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을 지지한 민주당 의원은 해리 리드 민주당 원내대표 한 사람밖에 없었다.

연방대법관 후임 지명은 8개월째 표류

이달 들어 새 업무연도를 시작한 미 연방대법원은 25년 만에 처음으로 연방대법관 9명을 다 채우지 못해 ‘8인 체제’로 재판을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3월 연방대법관 후보자로 지명한 메릭 갈랜드 워싱턴DC 연방항소법원장이 상원의 인준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화당이 주도한 상원은 인준은 고사하고 청문회조차 열지 않고 있다.

연방대법원에는 이민개혁이나 오바마케어 등 오바마 대통령이 야심 차게 추진했던 굵직한 개혁정책에 대한 위헌 여부를 가려달라는 사건이 계류돼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인사권이 상원에서 봉쇄되면서 연방대법원도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2기 임기 중 지지율 최고치는 위안거리

CNN은 오바마 대통령의 국정지지도가 55%를 기록해 2013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가장 높게 나타났다고 지난 6일 보도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올해 평균 지지율은 51%로 2009년 임기 첫해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임기 말 오바마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높은 것은 대선 후보들의 비호감이 역대 가장 높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구체적으로 트럼프에 대한 유권자들의 높은 반감으로 오바마가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백악관도 이런 분석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오바마 시대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장으로 넘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워싱턴=전석운 특파원 swchun@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