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없는 임산부 배려석, 임산부 40% “도움받은 적 없다”

입력 2016-10-09 18:09 수정 2016-10-09 21:45

임신 36주차인 정모(32)씨는 지하철 ‘핑크카펫’ 임산부 배려석 앞에 서기를 꺼린다. ‘자리를 양보해 달라’는 것 같아 쑥스럽기도 하지만 서 있어봐야 양보를 받지 못할 확률이 커서다. 지하철을 거의 매일 타지만 이용객이 적어 자리가 비어 있는 때를 제외하곤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본 경험도 거의 없다. 정씨는 “배가 불러온 뒤에도 양보받은 경험은 두 번 정도”라며 “한 번은 임산부 배려석 앞에서 기다리다 자리가 비었는데, 옆에 앉은 남자 분이 배려석으로 옮겨 앉기도 했다”고 말했다.

핑크카펫으로 도드라지게 디자인을 한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은 늘고 있지만 정작 실질적 배려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노약자석과 함께 임산부 배려석 문제를 지적하는 글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단골소재가 된 지 오래다. 지하철 자리다툼이 불씨가 되는 폭행 사건 역시 임산부를 불안하게 만든다.

핑크카펫이 늘기 시작한 것은 기존 임산부 배려석이 효과가 없다는 지적 때문이다. 2011년 한 임신부가 ‘임산부의 날’ 기념행사장에서 핑크색으로 칠하도록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대전지하철은 2012년 2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핑크색 임산부 배려석을 도입했다. 서울시도 지난해 7월 지하철 2호선과 5호선을 시작으로 핑크색 좌석을 확대하고 있다. 이원목 서울시 교통정책과장은 9일 “지하철 1∼8호선 임산부 배려석 7140석 가운데 5304석의 디자인 개선을 끝냈다. 나머지 1836석은 다음 달 말까지 개선을 마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임산부 배려석이 눈에 잘 띄도록 바뀌었지만 피부에 와닿는 변화는 크지 않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경로석’이나 마찬가지인 노약자석에 앉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임산부 배려석마저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을 성토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인터넷 ‘맘 카페’ 이용자는 “임산부 배려석에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 있어 노약자석에 앉았더니 어떤 할아버지가 ‘왜 임산부 자리에 앉지 않고 여기 앉느냐’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글을 올렸다.

임산부와 비(非)임산부 간 인식 차이도 있다. 보건복지부가 ‘임산부의 날’을 맞아 이날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임산부는 자신들이 배려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일반인이) 배려의 필요성을 못 느껴서’(44.7%)라고 답했다. 반면 일반인은 임산부를 배려하지 못하는 이유로 ‘임산부인지 몰라서’(49.4%)를 가장 많이 선택했다. 배려의 필요성을 못 느껴서라는 답은 4.3%에 불과했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