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정승훈] 공정경쟁이 그토록 어렵나

입력 2016-10-06 18:28

가정 하나. 내신 1등급인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있다. 성적 압박감으로 입시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특정 교사와 짜고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한 사실이 적발됐다. 학교는 징계하기로 했다. 그런데 징계에도 불구하고 이 학생의 내신은 1등급이 유지됐고 입시에서는 불이익이 없다. 다른 학생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

가정 둘. 주요 기업이 사원을 공채하기로 결정하고 논술시험으로 지원자들을 평가했다. 심사위원들이 지원자 8명의 논술을 평가해 1등부터 8등까지 점수를 매겼다. 그런데 기업 오너가 평가 결과를 무효화시키고 8등으로 평가된 꼴찌 지원자의 논술 내용을 모범답안으로 제시했다. 이 기업의 공채를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두 가지 가정에 대한 질문에 각각 “납득할 수 있다”거나 “공정하다고 할 수 있다”고 답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들여다보면 이 가정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용납하기 힘든 불공정 경쟁이 현실에서 이뤄지고 그 결과가 인정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헬조선’(hell+朝鮮)은 2010년에 온라인에서 처음 등장했다. 지옥이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헬·hell)와 조선의 합성어다. 한국은 지옥에 가까울 정도로 전혀 희망이 없는 사회라는 의미다. 처음 단어를 사용한 곳은 국내 최대 인터넷 커뮤니티로 알려진 디시인사이드의 많은 갤러리 가운데 역사 갤러리였다.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하고 한국을 비하하는 글을 올리는 이들이 많은, 아웃사이더 집단으로 인식됐던 곳이다. 처음 단어를 만들 때는 일본어 발음을 차용해 ‘헬조센’이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등장과정을 볼 때 도저히 사용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이 단어가 언제인가부터 평범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현실 때문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생활 속에서 부조리와 불합리를 경험하다보니 많은 이들이 자신의 처지를 잘 보여주는 어휘로 ‘헬조선’을 인식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변질되는 경우도 꽤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 단어의 문제제기 핵심은 공정 경쟁 여부다. 최근 비교적 정치 성향이 덜한 온라인 축구팬들 사이에 ‘헬조선’ 논란이 불거진 것도 이 때문이다. 심판을 매수해 승부를 조작하려 한 전북 현대에 대해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승점 9점을 감점하는 징계를 결정했는데 이 징계는 해당 팀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하는 조치였다.

올 시즌 무패행진을 벌이며 선두를 질주하고 있는 전북 현대는 승점 9점이 깎여도 2위보다 승점이 5점 더 많았다. 아마 이 팀은 무난히 올 시즌 우승을 차지할 것이다. 축구팬들이 ‘헬조선’을 언급하며 “심판매수를 시도하지 않은 구단만 손해를 본 징계”라고 비판하는 이유다.

정치적 논란을 차치하고 경제 논리로만 접근하면 고교 역사교과서에 대한 국정화도 공정 경쟁을 가로막는 조치다. 2014년 당시 검정 역사교과서 8종 중 하나였던 교학서 교과서를 채택한 고등학교는 전국 2300여개 중 단 3개교(0.1%)였다. 국정화의 논지는 다양하지만 경쟁 논리에선 시장에서 결정된 채택 과정을 일방적으로 되돌린 것과 마찬가지다. 오너 생각과 다르다고 결과를 엎을 거면 아예 “이러한 입장에 동의하는 사람만 지원하라”고 지원요강에 명시하는 게 낫다.

다음 달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 검토본 공개가 예정돼 있다. 공개되는 순간부터 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게 대다수의 예상이다. 역사학자들과 학교 현장에 있는 교사들까지 ‘헬조선’을 외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아 벌써부터 두렵다.

정승훈 디지털뉴스센터 온라인팀 차장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