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사법 4차혁명 어떻게… AI가 판결문 분석 승소 확률도 알려준다

입력 2016-10-04 00:02

1995년 1월 미국 프로풋볼 스타이자 배우 OJ 심슨(OJ simpson)의 재판에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은 그의 범죄 혐의만이 아니었다. 법정에 최초로 등장한 84인치 크기의 대형 스크린과 재판 내용을 컴퓨터로 실시간 입력하는 속기사의 모습이었다. 당시 언론은 ‘미래의 법정이 현실로 나타났다’며 대서특필했다. 지금은 일상적 풍경이지만 당시 컴퓨터라는 ‘첨단기술’의 법정 도입은 전 세계 사법부에 충격을 던졌다. 우리 법원은 그보다 앞선 1993년부터 법정 내 속기사를 시범 운영하며 정보화 사회의 변화에 발맞춰 왔다.

대법원장 “4차 산업혁명 대비해야”

20여년이 흐른 지금, 양승태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준비 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양 대법원장은 지난 1월 다보스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 의제로 논의된 후 ‘사법부도 준비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주변에 언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난 3월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제일 먼저 사라질 직업이 판사 등 법조인이라고 한다”며 “헌법이 부여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사법부가 창의·창조적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8월 열린 신임 법관 임관식에서는 “회고·후발적 속성이 두드러진 법률분야는 기술의 발달에 뒤처지거나 흡수되기 쉽다”며 “전문가들은 새로운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면 가장 타격받을 분야 가운데 하나로 법조계를 지적하고 있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클라우스 슈밥(78) 다보스포럼 회장이 주창한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은 물리학·디지털·생물학 세 가지 분야로 대표된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 기술이 의사결정을 내리고,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미래의 변화가 사법부에 미칠 파장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 법조인은 “앞으로 ‘알파고 판사’가 출현하고 법조계에도 엄청난 변화가 올 것이라는 얘기가 많지만, 뭐가 어떻게 변할지 뚜렷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며 “변화를 모르니 대비책도 특별히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슈밥 회장 “대전환기는 시작됐다”

슈밥 회장은 “대전환기는 이미 시작됐다”고 공언한다. 사법부 역시 변화의 흐름에 직면한 상태다. 미국의 인공지능 법률서비스 제공업체 ‘렉스 마키나’는 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한 판결 예측 시스템을 최근 상용화했다. 이 시스템은 연간 수천만건 이상의 연방법원 판결문과 소장 등을 분석하고, 이용자가 입력한 사건 정보를 토대로 승소 확률을 산출한다. ‘연방법원 판례에 의하면 당신의 승률은 몇 %다’라고 답을 내려주는 식이다. 2013년 영국 옥스퍼드대 마이클 오스본 교수는 향후 20년 이내 판사가 없어질 확률을 40%로, 변호사가 없어질 확률을 35%로 예상했다. 기술 변화가 물리적 노동뿐 아니라 고도의 정신적 노동 분야까지 대체한다고 본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미래의 사법부’는 어떤 모습일까. 전문가들은 피소(被訴) 가능성과 판결 결과를 예측하고, 법리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기술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분쟁해결 시스템’ 자체가 근본적 변화를 맞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일본 도쿄대 마쓰오 유타카 교수는 “소송 의뢰인의 사건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판례 등을 체크하는 일은 인공지능이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지난 5월 미국의 대형 로펌 ‘베이커 앤드 호스테틀러’는 한 스타트업 업체가 개발한 인공지능(AI) 변호사 로스(ROSS)를 도입했다. 방대한 판례를 수집하는 업무에는 인간의 두뇌보다 빠른 인공지능 기술이 이미 현실화된 것이다.

법정에도 디지털 기술이 도입되고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달부터 ‘실시간 재판안내 모니터 시스템’을 도입했다. 법정 입구에 설치된 모니터가 현재 재판 중인 사건과 자신의 사건 순번 등을 실시간으로 알려준다. 법원 게시판에 붙은 종이를 보며 자신의 사건번호, 재판 시간 등을 확인하는 모습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됐다. 미래의 법정은 디지털 기술과 로봇공학, 생물학 등이 조합된 모습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특허법원은 올해 3월 영상통화 프로그램을 이용해 판사와 사건 대리인 등이 재판 절차를 논의하는 화상회의 시스템을 도입한 상태다. 향후 사건 기록과 판결문 등을 클라우드 시스템을 이용해 어떤 장소에서든 확인할 수 있고, 재판 진행에 로봇이 활용되는 등 법정 모습도 크게 바뀔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