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속 원혼들에 바친 ‘詩의 진혼곡’

입력 2016-10-04 18:40 수정 2016-10-04 21:33
고은(83·사진) 시인의 신작 시집 ‘초혼’(창비·표지)이 최근 출간됐다. ‘무제 시편’ 이후 3년 만이다.

시인은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잦아들지 않는 분방한 시 정신으로 우리 시대의 호메로스이길 자처한다.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그리스 시대 서사시의 최고봉이다.

시인의 시어는 거침없다. 노랫가락처럼 흐르지만 맵다. 그 나이에 있을 법한 회한의 정조 따윈 없다. 여전히 가야할 길이, 해야 할 시인의 책무가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발도 내 혼백도 하룻밤 캄캄하게 쉴만하겠다”고 했지만 이내 “때마침 밤새워 기다려준 그믐달 이래/ 온 길도/ 갈 길도 다 새로 태어나겠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모습이야말로 시인의 시적 정체성이다.

“나는 8·15였다/ 나는 6·25였다 / 나는 4·19가야산중이었다/ 나는 곧 5·16이었다/ 그뒤/ 나는 5·18이었다”( ‘자화상에 대하여’ 부분)

이렇듯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살아낸 그가 ‘영매’(靈媒)가 되어 장편 굿시 ‘초혼’이 탄생한다. 시집 2부에 수록된 70여 쪽에 이르는 이 방대한 한 편의 시는 그 자체가 한민족의 대서사시이면서 진혼곡이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에 헤어진 이름이여!”

김소월의 동명 시 ‘초혼’을 그대로 인용하며 서두를 연 이 장편 시에서 ‘차용’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지국총 지국총 배 저어라’ 같은 구절들이다. 한데, 그 자체가 노랫가락 같은 익숙함을 주며 원혼을 부르는 이 시 읽기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 그것은 독자를 진혼의 행위에 동참시키는 초대다.

그리하여 대몽항쟁, 일제 식민지, 제주 4·3사건, 5월 광주, 그리고 작금의 세월호 사건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한국사에서 희생된 무수한 원통한 넋들을 위로하는 굿판은 밤이 새도록 계속되는데…. 위무의 깃발 사이로 핏빛어린 서사가 관통하고, 단도직입적인 언어는 역사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7공수여단 11공수여단 이자들의 만행 보아라/ 칠십 노파 뒤통수에 공수부대 철퇴 한방/ 머리에서 피가 솟아 선지피 분수대라/ 비명 한번 못 지르고 선지피 분수대라”

고은 시인 ‘초혼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가 아메리카 민중의 역사를 노래한 한 편의 대서사시 시집 ‘모두의 노래’(문학과지성사)에 비견할 만하다. 그러나 “천만 원혼 이제 고를 풀라”는 한국적 정서와 가락이 있어 더 소중하다.

어느덧 시력 58년에 이르는 고은 시인. “시의 무기수라는 천벌을 감수하며/내 조국을/ 내 조국 밖을 유배의 세월로 삼아왔다”는 그가 역사와 세계를 끌어안으려는 행보는 현재진행형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