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9월. 사업이 안정권에 접어들자 뒤늦게 여름휴가를 떠났다. 부산의 지인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 결혼하고 처음 떠난 여행이었다. 설렘을 안고 부산에 도착했을 때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서울지역 집중호우로 도로가 물에 잠기고 한강이 범람했는데, 회사로 물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직원의 다급한 전화에 아찔해졌다. 부리나케 서울로 돌아왔다.
책들이 가득 쌓여있는 도서총판 푸른언덕(당시 상호는 ‘풍문사’) 사무실은 이미 황톳물이 들어차 있었다. 물에 젖지 않은 책이라도 건질 생각에 두 팔을 걷어붙였다. 밤새 비를 맞으며 책 꾸러미들을 옮기는데 처절했다. 물이 다 빠지고 나니 상황은 더 처참했다. 망연자실해 있는 내 손을 남편이 꼭 잡으며 말했다. “여보, 어떻게 늘 좋을 수만 있어? 사업하면서 한두 번은 위기를 겪기 마련이야. 그럴 때 생각을 잘해야 해. 다시 시작하자.” 남편이 어느 때보다 듬직해 보였다.
남편의 말이 맞았다. 비가 그치고 나면 또다시 환한 햇살이 비친다. 먹구름 속을 헤치고 나온 햇살은 더욱 찬란한 법이다. 이렇듯 고난을 겪은 뒤에 얻은 것들은 비록 작을지라도 행복하고 감사하기만 하다. 나는 쓰레기로 변한 책들을 보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것을 정말 감사드립니다.”
천재지변의 위기를 감사함으로 잘 버틴 덕분에 거래처도 점차 늘어났다. 처음 출판사 한 곳으로 시작한 회사는 당시 5개 출판사의 총판을 맡고 있었다. 사업이 날로 번창하면서 서울 방배동에 사옥을 지었다. 남편은 회사 일에만 전념하고 사옥 짓는 일은 내가 담당했다. 그때가 1993년이었다. 건축을 시작한지 7개월 만에 지하 1층, 지상 5층짜리 건물을 번듯하게 완공할 수 있었다. 사옥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주님, 이렇게 아름다운 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공들여 지은 사옥은 오래가지 못했다. 주변이 재개발되면서 당장 건물을 헐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재건축조합과 보상 협의가 잘되지 않으면 아파트 건설사인 대기업과 힘겨운 법정 싸움을 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고 비용도 만만찮을 게 뻔했다.
나는 작정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인간적인 생각은 다 버리고 하나님께 모든 걸 맡겼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변호사 선임을 하지 않고도, 10원 하나 손해 보지 않고 제대로 보상받았다. 그리고 1996년 봉천동에 지하 2층, 지상 5층짜리 새 사옥을 마련했다. 보상금으로 부족한 금액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충당했다. 그런데 이 건물과 관련해 자금출처가 의심스럽다며 세무조사를 받게 됐다. 하지만 오랫동안 예식장과 남편 회사에서 회계 일을 맡았던 나는 영수증을 한 장도 빠뜨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 보상금 내역과 은행 대출 서류 등 뭐 하나 빠진 게 없었다.
결과적으로 한 푼의 세금도 추징당하지 않았다. 신앙을 바탕으로 정직하게 살아온 내 삶의 원칙들은 어려운 순간마다 힘이 돼 줬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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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10-03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