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이슈] 삼성, 제2 ‘휴대폰 화형식’ 효과?

입력 2016-10-04 04:04
잇따른 폭발로 리콜이 결정된 삼성 갤럭시 노트7의 제품 교환이 시작된 지난달 19일 고객들이 이동통신사 대리점을 찾아 새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1995년 3월 9일 경북 구미 삼성전자 공장.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임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500억원에 이르는 휴대폰이 불타고 있었다. 5개월 전 출시된 애니콜의 첫 제품 SH-770이었다.

이 제품은 출시 후 수개월 만에 시장점유율 30%를 장악했지만 불량률이 11.8%에 이르렀다. 이건희 회장은 판매된 휴대폰을 새 제품으로 교환해 주라고 지시했다. 불태워진 휴대폰은 바로 회수된 15만대였다.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휴대폰 화형식이다. 이후 삼성전자는 품질 경영을 인정받게 됐고 세계적인 전자회사가 됐다.

21년여가 지난 지금 삼성전자는 다시 한번 위기를 맞았다. 갤럭시 노트7의 충전지 폭발사고로 전 세계에 공급된 250만대(약 1조5000억원)를 리콜하기로 했다.

리콜, 기업의 갈림길

삼성전자는 리콜 결정을 재빠르게 내렸다. 우선 소비자의 사용 금지를 권고한 뒤 한국에서 가장 먼저 자발적 리콜 조치를 결정했고 이어 미국 등에서도 리콜에 들어갔다. 여타 기업들의 리콜 사례와는 다른 행보였다. 이케아는 미국에서 아동 사고가 발생한 말름 서랍장의 리콜 결정을 10년여 만에 내렸고 한국에서도 최근에야 리콜에 들어가기로 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국가기술표준원 관계자는 “소비자 사용권고와 리콜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면서 “사용권고는 소비자 판단에 맡기는 것이지만 리콜은 제조업체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기 때문에 웬만해선 리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고 했다.

표준원의 설명처럼 리콜은 회사 측이 제품 결함을 발견, 보상해주는 소비자 보호 제도다. 우리말로는 결함보상, 소환수리라 한다.

리콜 자체가 기업에는 부담이 되지만 때론 기회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게 82년 미국에서 일어난 타이레놀 리콜 사례다. 타이레놀을 복용한 시카고 시민 7명이 죽었다. “타이레놀을 먹으면 죽는다”는 소문이 확산됐다. 자사인 존슨앤드존슨은 최고경영자까지 나서서 사태 수습에 들어갔다. 서둘러 전량 리콜 결정을 내렸다. 돈으로 환산하면 수억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해당 제품 생산도 수개월간 중단시켰다. 당시 타이레놀은 미국 성인용 진통제 시장의 35%를 점하고 있었다.

사건의 전말은 얼마 후 밝혀졌다. 한 범죄자가 불특정 다수를 살해할 목적으로 타이레놀 캡슐에 청산가리를 주입한 것이었다. 소비자들 사이에선 타이레놀을 동정하는 여론이 형성됐다. 타이레놀은 물론 존슨앤드존슨까지 엄청난 신뢰를 얻었다. 시장점유율 1위였던 아스피린에 비해 부작용도 적고 안전하다는 이미지까지 심었다. 시장점유율은 95년 70%까지 치솟았다.

뒤늦은 리콜로 기업 이미지가 추락한 사례도 많다. 대표적 사례가 2009년 도요타 리콜 사태다. 긴급전화로 녹음된 차량 사고 당시 통화 내용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면서 도요타는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녹음 파일엔 차에 문제가 있다는 내용과 사고 당시 상황이 그대로 녹음돼 있었다. 도요타는 “차의 품질에는 문제가 없다”는 일관된 입장만 밝혔다. 비난 여론이 커지자 결국 리콜에 나섰지만 늦었다. 도요타를 옹호하던 일본 언론들까지 결국 ‘검은 도요타’라며 비판적으로 돌아섰다.

최근 야후뉴스는 삼성의 리콜 결정 이후 미국에서 50만명이 갤럭시 노트7을 반납했고 그 중 10%는 다른 제품으로 갈아탔다고 보도했다. 이들의 변심을 두고 야후뉴스는 삼성에 부정적 인식이 생겼기 때문일 수 있고, 신규 제품을 구매하기 위한 단순 변심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의 리콜 결정이 위기가 될지, 반전의 기회가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보호무역의 희생양?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경제의 실패가 외국 탓이라며 극단적인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도 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보호무역주의에 동조하고 있다.

노트7 폭발에 미국이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자 보호무역주의 정서가 확산되는 신호라고 보는 시각도 힘을 얻고 있다. 삼성전자의 노트7 리콜 결정이 있던 시기에 애플은 아이폰7을 출시했다.

이전에도 미국이 보호무역주의로 한국 기업의 발목을 잡았다는 의혹은 여러 차례 제기됐다. 2012년 삼성과 애플의 특허 소송이 대표적이다. 코오롱이 2009년 미국 화학회사인 듀폰으로부터 아라미드 관련 영업비밀을 침해했다며 소송을 당했을 때도 보호무역주의 때문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전문가들도 미국의 ‘키킹 래더’(사다리 차기) 전략이라고 말한다. 자기들이 올라간 뒤 다른 사람들은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차 버린다는 뜻이다. 고부가가치 산업에 한국 등 후발주자들이 진입을 시도할 경우 특허나 환경오염 등을 이유로 소송을 거는 전략이다.

미국 내에서 보호무역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보스턴 지역 매체인 프로비던스저널은 과거 일본과 독일, 최근에는 한국과 싱가포르 등이 고부가가치 제품들을 양산하면서 미국과 조용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했다. 프로비던스저널은 브라이언트 대학의 국제 비즈니스 프로그램 감독인 안드레 라미레즈 교수의 말을 빌려 미국식 보호무역주의는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조용한 전쟁으로 세계 무역에서 고립될 경우 미국 경제는 철저히 뒤처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라미레즈 교수는 “품질, 생산성, 혁신을 끌어올리는 것이 평평한 세계에서 치러지고 있는 조용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세종=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그래픽=이석희 기자